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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文香世談] 그 등대는 아직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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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6. 29. 17:50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세상사든 개인적인 일이든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한자리에 앉아 있기 힘들 때, 우리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무뎌진 감성을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기억이란 시간이 지나도 아득한 풍경처럼, 마음 한편에 흐릿하면서도 선명하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떠났던 여름 바다, 캠핑 장비는 형편없었지만, 우리의 기대와 설렘은 작은 배낭에 다 담기엔 벅찼다.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진 대구선 완행열차, 기차가 천천히 출발하자 우리는 통기타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혼날까 봐 걱정했던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던 어른들의 미소는 창밖으로 흐르던 산과 들처럼 느긋하고 포근했다. 눈을 감으면 친구들의 웃음소리, 차창을 스쳐 가던 풍경들이 마치 오래된 필름 영화처럼 느릿하고도 정겹게 다가온다.

포항을 거쳐 도착한 동해 구룡포, 우리는 민박집에 짐을 풀고 곧장 해변으로 나갔다. 모래는 태양의 조각처럼 뜨거웠고, 짠바람은 오래된 편지처럼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끼니는 우리가 직접 해결해야 했기에 날마다 식재료를 사기 위해 읍내를 다녀와야 했다. 바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언덕길을 걷는 일, 그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사유의 시간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길 위에서 멈춰 서면, 멀리 등대가 보였다. 언덕길은 한 편의 시 같았고, 해 질 무렵 바다는 그림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등대는 가까이 가면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위로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도 특정 장소, 함께 했던사람, 그곳을 감싸던 공기의 감촉은 그대로 보존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는 스코틀랜드 해안의 별장에서 램지 가족이 보내는 시간과 그 흐름을 섬세하게 그린 그녀의 대표작이다. 겉보기에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안에는 전쟁과 죽음, 무심히 흐르는 시간의 잔혹함이 스며있다. 특히 제2부 '시간의 흐름(Time Passes)'에서는 "시간이 무심히 흐른다"라는 문장이 반복되며 모든 것이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변해감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흩어지고, 관계는 멀어지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등대가 있다.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하던 등대는 소수만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 도달은 단순한 항해가 아닌, 상실과 기억, 무상함과 존재의 본질을 탐색하는 조용한 여정이다. 울프의 등대처럼, 나에게도 구룡포의 등대는 단순한 구조물ㄴ이 아니다. 처음 만난 그 등대는 청춘의 희망이자, 간절한 빛으로 느껴졌다.

"인생이란 한 줄기 빛, 그 위를 걷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오래 가슴에 품고 있는 문장이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바다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존재인지 모른다. 등대는 그 끝에서 우리를 부른다. 닿지 못하더라도, 그 빛은 묵묵히 방향을 알려준다. 모든 것은 거리를 둘 때 가장 아름답다. 사람과 사람 사이, 기억과 현실 사이, 삶과 죽음 사이도 그렇다. 그 거리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고여 있다. 그리움, 상실, 슬픔, 그리고 조용한 아름다움, 붙잡고 싶지만, 본래 잡을 수 없는 것들이다. 오히려 잡히지 않기에 우리는 계속 갈망하며 그것들을 향해 나아간다. 고통스러운 여정 자체가 삶이다.

내 마음속 구룡포 등대, 가까이 가면 시멘트 기둥일 뿐이지만, 멀리서 바라본 그것은 젊은 날의 열망이자 이상의 상징이었다. 삶도 그렇다. 가까이서 보면 복잡하고 아프다. 너무 다가서면 형태조차 흐릿해진다. 하지만 거리를 두면 하나의 풍경이 된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멀리서는 평온해 보이지만, 매 순간, 다르게 출렁인다. 잔잔하던 물결은 금세 거센 파도가 되고, 맑던 하늘은 순식간에 흐려진다. 기쁨은 오래갈 듯하지만, 이유 없는 슬픔이 불쑥 찾아온다. 그리고 다음 날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흘러간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기억을 붙잡는다. 살아간다는 건 지키고 싶은 관계와 기억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기만의 등대 하나를 품고 산다.

"기억은 삶의 허공을 채우는 가장 강력한 존재다." 뼛속에 새겨져 있는 문장이다. 나는 이제 그 등대를 보러 가지 않는다. 기차는 멈췄고, 민박집은 사라졌으며, 언덕길도 옛 모습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 그 등대, 그 길은 그대로 존재한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은 결국 도달할 수 없는 등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빛은 멀고, 길은 고단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사랑을 배우고, 상실을 견디며 살아가려 애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 등대, 여전히 거기 있다. 나는 더 이상 찾아가지 않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그 빛은 남아 있다. 그대, 이 여름, 작열하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고독한 해변의 길손이 되어, 가슴 속 등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 보라.

/시인·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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