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이영조 박사의 정치경제 까톡] 군부 독재와 민중주의의 끈질긴 유산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biz.asiatoday.co.kr/kn/view.php?key=20241112010005958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11. 12. 17:33

슬픈 라틴아메리카 잃어버린 100년 (8)
이영조
이영조 전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회장
1960년대에 이르면 남미의 민중주의 정치경제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수출대체산업화가 한계에 이른 상태에서 선심성 퍼주기로 늘어난 재정적자는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과거 '통제된 동원'의 대상이었던 조직노동은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할 만큼 강력해졌다. 연일 시위와 파업으로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성장은 사실상 멈췄다. 결국 군부가 개입했다. 1964년 브라질, 1966년 아르헨티나에서 시작해 남미 곳곳에서 포퓰리스트 정권은 도미노처럼 쓰러져갔다.

이때의 군부는 '경제발전이 곧 안보'라는 새로운 교의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른바 '안보발전론(doutrina de segurana e desenvolvimento)'은 쿠바혁명의 충격으로 탄생했다. 핵전쟁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에서 국제공산주의는 제3세계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폭동, 반란, 내전의 방법을 동원하는데 이에 비옥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가난과 불평등 같은 저발전 상태이기 때문에 경제발전이 바로 국가안보라는 논리였다. 브라질의 고등군사학교, 페루의 참모학교 등 군 교육기관의 커리큘럼도 경제발전 중심으로 짜여졌다. 한국의 국방대학원이 그렇듯이 이들 군 교육기관에는 민간인도 다녔다.

이렇게 연결된 군과 민간의 기술관료들(technocrats)은 표라면 나라도 팔아먹을 정치인들에 비해 자신들이 경제발전을 위한 정치를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상 민군 합작품인 군사정권은 민중주의가 남긴 나쁜 유산을 청산하고 경제발전을 달성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워낙 뿌리가 깊은 병이라 칠레를 제외하고는 군사정권의 철권으로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남미의 군사정권이 첫 번째로 한 일은 포퓰리즘의 유산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정치조직과 사회운동을 탄압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다. 탄압과 억압은 군정 이전에 민중주의적 혹은 혁명적 위협이 컸으면 컸을수록 심했다. 혁명적 게릴라운동이 존재했던 아르헨티나에서는, 미국 영화 '오피셜 히스토리'에서 그리듯이, '국가의 적'에 대한 광범한 폭압과 박해, 고문, 암살이 자행되었다. 군대와 준군사집단들에 의해 수행된 '더러운 전쟁'의 결과로 9000명에서 2만5000명까지로 추정되는 사람이 '실종'되었고 군사정권에 대한 모든 조직화된 반대가 파괴되었다.
민중주의 정부에 의해 높은 수준의 민중동원이 있었던 브라질에서도 탄압은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다. 이른바 '청소작전(Operacao Limpeza)'으로 수만 명이 경찰과 군 정보기관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고 441명이 공민권을 상실했다. 이 가운데는 전직 대통령 3명, 주지사 6명, 연방의원 55명, 군 장교 122명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탄압은 자본주의체제 자체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던 칠레에서 가장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일어났다. 쿠데타 직후 노동총연맹과 민중연합(Unidad Popular)을 불법화한 데 이어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제한했으며 군부를 포함한 모든 사회조직에서 잠재적인 체제반대세력을 숙청했다.

일단 구체제를 '청소'한 군사정권은 번거롭고 무익한 정치질을 없애는 '반정치의 정치(politics of antipolitics)'를 제도화하려고 했다. 아르헨티나 비델라 정권의 '국가재편'에서 볼리비아 반제르 정권의 '헌법화', 칠레 피노체트 정권의 '권위주의적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정치적 프로젝트가 시도되었다. 브라질의 경우 옛 헌법을 남겨는 두었지만 새로운 '제도법'을 통해서 민주적 참여를 제한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포퓰리즘 시기의 국가주도의 국수적이고 폐쇄적인 수입대체산업화를 지양하고 시장 중심의 개방적 경제정책을 지향했다. 하지만 철권통치 아래 끝까지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인 칠레를 제외하면 성과는 크지 않았다. 포퓰리즘에 찌든 경제가 정책방향이 바뀐다고 하루아침에 기적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 성과가 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그런 인내심은 없었다. 민중주의의 물리적 유산은 상당히 제거했지만, 국가의 시혜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사고조차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공짜'의 마약에 취한 사람들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경제발전을 표방했던 군부는 위기를 맞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남미의 군사권위주의는, 기예르모 오도넬의 지적대로,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그 배제적 성격 때문에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기존의 제도는 부정되었지만 새로운 제도는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제도를 통한 정당화'는 처음부터 어려웠다. 여기에 더하여 시민의 정치참여를 배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를 통한 정당화'도 불가능했다.

결국 군부정권에 남은 것은 '실적을 통한 정당화'밖에 없었다. 높은 경제성장률 달성이 어려우니 물질적 혜택이라도 베풀어 민심을 달래야 했다. 실제로 남미의 여러 탈(脫)민중주의 정권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민중주의정권 못지않게 각종 복지지출이 증가한 것은 이러한 '생존의 정치'로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취약한 정당성을 각종 시혜로 메운 것이다. 그 결과 군사정권도 민중주의정권 못지않게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재정적자는 새로운 통화의 발행으로 충당되었고 이것은 다시 인플레이션을 낳고 있었다.

터널에 갇힌 군부정권에 희망의 빛이 된 것이 외채를 통한 탈출이었다. (계속)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영조 (전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회장)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