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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이 넘도록 차탈회위크에 5000명에서 8000명 인구의 대규모 공동체가 존속했다. 먼저 생긴 '동쪽 언덕(East Mound)'은 13.5 헥타르로 축구장 25개 정도, '서쪽 언덕(Weste Mound)'은 8헥타르, 축구장 15개 정도의 면적이다. '동쪽 언덕'에 모여 살던 마을 사람들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 점차 '서쪽 언덕'으로 이주했다. 주변을 흐르는 큰 강의 물길이 바뀌었기 때문이란 설명이 있지만, 지금까지의 발굴 성과로는 무엇도 확증할 수는 없다. 고고학 발굴은 현재 5%밖에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진정 빈부격차도, 신분 차이도, 남녀 차별도 없었을까?
지금껏 출토된 유물만 보면 적어도 다음 몇 가지 사실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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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차탈회위크는 지배계급이나 정부 기관이 따로 없는 비슷한 사람들이 평등한 공동체였다고 추정된다. 골목길 하나 없이 다닥다닥 벽들이 붙은 집들 대부분 비슷
한 크기이고, 내부 장식도 크게 다르지가 않다. 개중에는 규모가 다소 큰 집터도 있다. 그런 집들의 바닥을 파보면 어김없이 매장된 시신 유골이 다수 발견된다. 학자들은 편의상 그런 집들을 역사관(historic house)이라 명명했으나 역사관 역시 아궁이와 부엌을 갖춘 주거 공간이었다고 여겨진다.
셋째, 남녀평등 사회였다. 발굴된 유골에 대한 생화학적 분석 결과에 따르면, 차탈회위크의 남녀는 똑같은 음식을 섭취했고, 대개 비슷한 노동을 했으며, 야외 활동의 시간도 대동소이했다고 파악된다. 물론 남녀는 모두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고, 사후 같은 의식으로 매장되었다. 차탈회위크가 남녀 구분 없이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다 같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누렸던 젠더 평등사회였다고 주장이 꽤 설득력 있다.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다. 그저 차탈회위크의 지구인들은 신분제도도, 정부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 오랜 전통과 관습에 따라 대대로 천 년의 세월을 대체로 평화롭게 잘 살다가 전염병이나 환경 재앙으로 마을 전체가 몰락하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차탈회위크를 고대의 유토피아라 미화할 필요는 없다. 수천 세대가 다닥다닥 벽이 맞붙은 밀집된 집촌에서 살아갔는데 사회적 갈등이 없었을 리 없다.
과학자들은 발굴된 93구의 시신 중에서 25구에서 부수어졌다가 다시 붙은 흔적을 발견했다. 그중 12구에선 다섯 차례나 뭉뚝하고 딱딱한 물체에 맞아서 뼈가 부러졌던 흔적이 보인다. 오하이오 대학의 랄슨(Clark S. Larsen) 교수는 그 시신들에 생긴 원형의 골절상이 발굴 현장에서 많이 나오는 토구(土球, clay bal)로 맞은 흔적이라 주장한다. 비좁은 환경에 밀집해 살아가면서 촌민들 사이의 사회적 갈등이 증폭됐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 그들은 왜 집 안에 시신을 묻었을까?
인구가 늘면서 마을 공간이 조밀하게 느껴졌다면 왜 그들은 더 넓은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가지 않았을까? 왜 그들은 벌집처럼 밀집된 집촌에 붙박여 개미 군단처럼 살아가야만 했을까? 거기에 대해선 고고학자 누구도 명쾌한 설명을 내리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도 한 가지 단서가 있다면 바로 매장 풍습을 들 수밖에 없다. 지난 회에 소개했듯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조상의 시신들을 집 안 바닥 아래 매장한 채 살아갔다. 지구인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장례 풍습이다.
일반적으로 지구인들은 사자(死者)들과 멀리 떨어져 생활한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묘지를 두는 현상은 대다수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2013년 발견된 호모 날레디(Homo Naledi)는 대략 33만5000년 전에서 23만6000년 전에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호미닌(hominin, 인류의 조상)인데, 그들 역시 멀리 떨어진 동굴에 시신을 묻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족의 시신을 먼 곳에 매장하는 풍습이 그만큼 오래됐다는 얘기다.
이와 대조적으로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주거 공간을 동시에 묘지로 만드는 매우 특이한 풍습을 장시간 이어갔다. 특별한 인물이 사망하면 그 시신에서 머리만을 잘라내어 집 안에 모시고 살아가다가 다른 가족이 죽으면 그 머리를 시신의 품에 안겨서 함께 매장하는 풍습도 있었다.
일부 고고인류학자들은 이곳의 특이한 매장 풍습이 건물에 기초를 놓을 때 바치는 '건물 희생(犧牲, building sacrifices)'의 일종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새로 집을 지을 때 기초 아래 희생을 매장하는 풍습은 동아시아와 중동의 다수 지역에서 발견된다. 차탈회위크에서도 건물 희생의 의식이 행해졌다고 사료된다. 지난 회에 말했듯, 차탈회위크는 낡은 집을 허물고 그 위에 그대로 같은 구조의 집을 짓는 풍습이 있었다. 차탈회위크에서 고고학자들은 켜켜이 쌓아 올린 집의 바닥 아래 바닥을 파고 들어가 맨 밑바닥에 이르렀을 때 신생아(neonate)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갓 죽은 신생아를 새로 짓는 건물을 향해 희생으로 헌납하는 의식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적어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한 공간에 존재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한 믿음이 그들을 그 오랜 마을에 그대로 묶어두지는 않았을까? 대대로 조상들을 묻고서 함께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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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