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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 ‘불가항력’ 선언에 유가 1983년 이후 최대 폭등…‘1973 오일쇼크’ 악몽 재현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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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승인 : 2026. 03. 08. 11:50

쿠웨이트·UAE 등 걸프 산유국 잇단 감산 돌입
호르무즈해협에 1000척 발 묶여
원유보다 가파르게 뛰는 정제유 가격에 소매 연료비 급등
할인받던 러시아산 석유에 웃돈 얹는 기현상
1973년 오일쇼크 그림자
IRAN-CRISIS/GULF-OMAN
로자산 유조선이 7일(현지시간) 오만 무스카트에 정박해 있다./로이터·연합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 충돌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사실상 멈추면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공급 차질이 현실화하고 있다.

쿠웨이트가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하고 원유 생산과 정제 처리량을 줄이기로 하자, 이라크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다른 걸프 산유국들도 저장시설 포화와 수출 차질에 대응해 생산 조정에 나섰다.

이 같은 연쇄 감산과 해상 물류 병목의 결과로 국제 유가가 급등했고, 미국 내 휘발유·디젤 가격도 빠르게 오르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대체 공급원으로 부상하며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IRAN-CRISIS/GULF-OMAN
로자산 유조선이 7일(현지시간) 오만 무스카트에 정박해 있다./로이터·연합
◇ 호르무즈 봉쇄 속 산유국 생산 조정 확대

쿠웨이트 국영 석유회사 KPC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선박 통항 위협과 쿠웨이트에 대한 계속된 공격, 그리고 아라비아만에서 원유와 석유제품을 실어 나를 선박이 거의 사라진 상황을 이유로 원유 생산과 정제 처리량 감축을 결정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계약상 의무 이행을 면제하거나 유예할 수 있는 '불가항력' 조항을 발동한 것이다. KPC는 아시아로 납사(나프타)를, 북서유럽으로 항공유를 수출하는 주요 공급처다.

쿠웨이트의 원유 생산 및 정제 처리량 축소는 7일 초반 하루 약 10만 배럴 규모로 시작됐으며 저장 여건과 호르무즈 해협 상황에 따라 8일에는 거의 세 배 수준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전했다.

UAE의 아부다비국영석유회사(ADNOC)는 "저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해상 생산 수준을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라크는 저장시설이 빠르게 차오르면서 생산을 줄이기 시작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세계 최대 원유 수출 거점인 라스타누라 터미널도 이란의 공격 여파로 운영 차질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국 가운데 하나인 카타르는 LNG 수출에 차질이 발생하자 일부 공급 계약에 대해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영국 에너지 컨설팅업체 우드 맥킨지의 '걸프협력회의(GCC) 국가 정유시설 용량 분포' 자료에 따르면 쿠웨이트·바레인·카타르·UAE의 주요 정유시설은 페르시아만 연안에 밀집해 있다. 이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 이들 국가가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는 구조임을 보여준다. 다만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는 일부 원유를 우회 수출할 수 있는 송유관과 대체 항로를 갖고 있어 모든 수출 경로가 동시에 차단되는 것은 아니라고 블룸버그는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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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시민들이 7일(현지시간) 주유소에서 줄을 서 있다./AFP·연합
◇ 호르무즈 해협 마비…'국적 위장' 꼼수까지 등장한 물류 대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 이동은 거의 정지 상태다. 블룸버그는 6일 기준 페르시아만에 남아 있는 빈 초대형 유조선이 9척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이는 저장시설 포화가 더 심해질 경우 산유국들이 추가 감산에 나설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약 1000척의 선박이 걸프 해역과 그 주변에 묶여 있으며, 이들의 누적 가치가 약 250억 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또 최소 10척의 선박이 자동식별장치신호(AIS)에 '중국 소유(Chinese Owner)' '전원 중국 선원(All Chinese Crew)' '중국 선원 승선(Onboard)' 같은 문구를 넣어 공격을 피하려 했고, 일부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신호를 조작하는 방식도 사용했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는 선박 호위와 보험 지원을 통해 항로 재개를 모색하고 있다. 미국은 해군 호위와 함께 약 200억달러 규모의 재보험 지원을 내놓았지만, 선주들은 보험보다 승무원 안전이 더 큰 문제라며 즉각적인 항행 재개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블룸버그·AP·FT가 보도했다.

Iran US Oil California
원유 운반선 '키오스호'가 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엘 세군도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최대 석유 정제 시설 중 하나인 셰브론 프로덕츠 컴퍼니 정유소로 화물을 펌핑하고 있다./AP·연합
◇ 1983년 이후 최대 폭등…원유보다 더 뛰는 정제유 가격

시장에서는 지정학적 위험을 넘어 실제 운영 차질이 가격에 반영되고 있다. 팩트셋의 '미국 선물 가격 흐름'에 따르면 3월 들어 초저유황 디젤 선물이 약 70%, 휘발유가 약 60%, 원유가 약 40% 상승했다. 원유보다 정제유 가격이 더 가파르게 오른 것은 정유시설 차질과 수송 병목이 동시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은 주간 36% 올라 배럴당 90.90달러에 마감했는데, 이는 1983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의 주간 상승이다. 브렌트유도 주간 28% 올라 배럴당 92.69달러를 기록했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이번 분쟁이 단기간에 해결될 조짐이 없을 경우 국제 유가가 다음주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래피단에너지그룹의 설립자 겸 대표인 밥 맥널리도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수주간 이어지는 사태로 시장이 인식할 경우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 이상으로 상승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Iran US Gas Prices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 주유소에 갤런(3.785ℓ)당 휘발유 가격이 표시돼 있다./AP·연합
◇ 美 연료비 폭등에 소비자 비명…트럼프 '중간선거' 정치적 시험대

미국 내 연료 가격도 빠르게 오르고 있다. 미국자동차협회(AAA) 자료에 따르면 이란 공격이 시작된 이후 미국의 휘발유와 디젤 소매 가격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6일 기준 미국 평균 휘발유 가격이 갤런(3.785ℓ)당 3.32달러, 디젤이 4.33달러다. AP와 뉴욕타임스(NYT)는 7일 휘발유 평균 가격이 3.41달러, 디젤이 4.51달러 수준까지 올랐다고 보도했다.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휘발유 평균이 갤런당 5.08달러까지 치솟았다.

연료 가격 비교 사이트 가스버디의 석유 분석 책임자인 패트릭 디 한은 미국인들이 휘발유 가격 상승으로 1주일 전보다 하루 약 1억2200만달러를 추가로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 같은 연료비 상승이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에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 다만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미국의 석유 생산이 사상 최고 수준이라며 장기 충격 가능성을 낮게 봤다. 이에 FT는 전략비축유가 2022년 이후 줄어든 상태여서 시장 안정을 위한 정책 수단이 예전보다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Russia Putin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알렉산드르 바스트리킨 러시아 수사위원회 위원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AP·연합
◇ 바다 떠돌던 러시아 석유 '귀하신 몸'…에너지 위기 최대 승자 부상

이번 위기에서 러시아가 가장 큰 수혜를 입고 있다고 WSJ·NYT가 전했다. 중동 원유 공급이 막히자, 인도와 중국 등 주요 수입국이 러시아산 원유 확보에 나서면서, 지난달까지 브렌트유 대비 큰 폭 할인에 거래되던 러시아산 원유가 일부 거래에서는 브렌트유보다 배럴당 1~5달러 높은 가격에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WSJ에 따르면 미국 재무부는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허용하는 30일 유예와 함께 독일 내 로스네프트 지사와의 거래를 허용하는 일반면허를 발급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영 TV에서 "이제 다른 시장이 열리고 있다"고 말했고,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도 이란 전쟁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요를 늘리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카네기국제평화재단(CEIP) 산하 카네기러시아유라시아센터의 알렉산더 가부예프 소장은 이란과 베네수엘라 공급 차질이 중국 원유 수입의 약 17%를 차지하는 만큼 중국이 '시베리아의 힘 2' 가스관 사업을 다시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고 NYT는 전했다.

반면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유럽이 러시아 에너지로 돌아가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잘못된 선택이라고 경고했다.

◇ 1973년 오일쇼크의 그림자…글로벌 '모든 것의 위기' 덮치나

블룸버그는 이번 사태를 1973년 오일쇼크와 비교하며 에너지 위기가 '모든 것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1973년 당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시절의 주유소 앞 긴 줄과 휘발유 배급제가 야기한 희소성의 심리가 현재 아시아와 유럽·미국의 전반적인 경제에 다시 재현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실제 디젤 가격은 유럽에서 두 배로 뛰었고, 항공유 가격은 아시아에서 200% 가까이 상승했다.
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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