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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학의 내가 스며든 박물관] 인간의 평화를 키우는 아픈 역사의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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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8. 10. 18:11

<13> 미국 LA '관용의 박물관'(Museum of Tolerance)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아이들을 연상케 하는 옷의 벽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아이들을 연상케 하는 옷의 벽.
인류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로 전쟁과 살육, 학살은 어떤 드라마보다 더 끔찍하게 우리의 현실을 압도하고,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에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심리적 상처를 남긴다. 인간의 심리적 방어벽에 구멍이 뚫린 상태, 우리는 그것을 '트라우마'라 부른다. 그중에서도 '홀로코스트'처럼 "특정한 시점에 발생한 실제 사건을 개인과 집단들이 경험한 상실감"을 가리키는 역사적 트라우마는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에 오래도록 아픈 기억을 드리운다.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박물관은 '역사란 타인의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로 거듭 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아시아의 일본군'위안부'처럼, 서구 사회는 '홀로코스트'가 늘 트라우마이다. 1993년 2월 개관한 LA의 '관용의 박물관(Museum of Tolerance)'은 인종적 편견을 주제로 1977년에 설립된 유태인 연구단체 '지몬 비젠탈 센터'가 낸 5000만 달러의 기부금으로 건립한 곳이다. (지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은 유태인 포로수용소의 생존자로서 나치 전범 색출과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세계에 폭로했던 '유태인의 영웅'이었다.) 개관 후, 매년 13만명의 학생을 포함해서, 25만명이 찾는 이곳을 전 세계 언론들은 '꼭 봐야 할' 명소로 만들었다.

이곳 전시실은 동선과 관람시간에 따라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닫힌다. 정해진 관람시간을 채우지 않고는 박물관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얘기다. 첫 전시실에 들어서니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있기 전 유럽 유태인들의 생활이 소개되고, 나치 독일의 어느 거리를 재현한 곳에서는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이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장면이 보였다. 처참하게 폭격당한 미니어처 거리와 유태인 처리방법을 논의하는 장면, 그리고 유태인의 나라별 분포도와 함께 1100만명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게토(수용소)로 꾸며진 문을 들어서면 홀로코스트가 소개된다. 학살당한 유태인 수는 586만명. 그 입구에 씌어진 'Never to Return!'이란 글이 섬뜩하다. '가스실'을 재현해 놓은 마지막 전시실에서는 양쪽 콘크리트 벽에 걸린 사진과 동영상 속 증언을 통해 유태인들이 가스실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남몰래 흐느끼는 늙은 관람객을 보았다. 나는 이 광경이 세계에 만연한 인종차별의 슬픈 미래인듯한 착각에 빠졌다. 마지막 화면 속에 고정된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자매의 웃는 모습이 한참이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드디어 출구가 열린다. 정확히 1시간이 지났다. 출구 옆에 또 하나의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희망이란 것은 기억할 때 살아있는 것이다.'

지금 '관용의 박물관'에는 2013년 10월부터 '안네 프랑크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1929년 네덜란드의 유태인 소녀 안네가 태어난 프랑크푸르트와 1934년 가족이 도착한 암스테르담의 거리를 보여주면서, 살해된 150만명의 아이들이 연상되는 빛바랜 옷들을 켜켜이 개켜 놓은 원형복도에서부터 안네의 이야기를 만난다. 1만7000여 개의 접힌 옷들이 벽을 이루며, 색채는 밝고 경쾌한 톤에서 점차 어둡고 압축된 공간으로 바뀌는데, 이것은 나치 점령하의 불안감과 절망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구조물이다. 안네의 유물, 사진과 함께 13번째 생일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의 복제품과 세계 30개국에서 출간된 '안네의 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몬 비젠탈이 안네를 체포한 사람을 추적하기 위해 사용했던 게슈타포 전화번호부, 암스테르담 백화점에서 찍은 사진과 펜팔 편지들. 전시장은 260도 스크린으로 2년간 숨어있던 식료품공장 뒷방처럼 꾸며져 안네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도 들려준다. 배우 헤일리 스타인펠트의 내레이션으로 10분 정도의 영상이 나오는데, 안네의 사촌 버디 엘리아스가 밝히는 어린 시절 기억과, 유일하게 남은 안네의 영상이 포함되어 있어 실감 나는 체험을 선사한다.

또한 영상은 안네를 잡아간 나치장교 칼 실버바우어를 철저한 추적 끝에 찾아낸 이도 비젠탈이었음을 알려준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이 정말 착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안네의 일기 한 구절에 가슴 아팠던 기억을 갖고, 터치스크린 앞에서 '장티푸스로 수용소에서 죽은 16살의 안네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겠노라'는 서약서를 썼고, SNS로 여러 사람에게 날렸다.

'관용의 박물관'을 나서며 서구 사회가 역사의 망각과 퇴행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최근 프랑스에선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인권의 아이콘이었던 시몬 베이유의 사진이 나치 문양으로 훼손된 채 발견되기도 했다. 언론들은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지면서 반(反)유대주의라는 금기가 무너졌다"고 했지만, 좌우의 젊은 계층이 모두 반유대주의 선동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똘레랑스(관용, tolerance)'가 도리어 인종주의와 파시즘까지 포용하라는 빗나간 탕평(蕩平)의 프레임워크가 된 이유는 또 무엇일까.

트라우마의 역사는 어떤 이유로든 봉인될 수 없다. 과거를 사실적으로 재현했느냐, 아니냐를 넘어 역사에 대한 능동적 성찰을 이끌어내면서 생생하게 느끼도록 현재화해 준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올해 우리는 해방 80년, 유럽국가는 종전 80년을 맞았다. 뭘 잊고, 뭘 지우고, 뭘 새겨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박물관을 '인간의 가장 위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장소'라고 정의한 앙드레 말로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나는 반드시 기억하고 증언해야 하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평화가 자라는 위대한 이 박물관에 기꺼이 스며드는 것이다.

※ 홀로코스트를 보여주는 박물관은 전 세계에 300여 곳 이상. 올해는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80주년을 맞는 해이므로 더욱 관심이 집중된다. 올 1월 10일부터 9월 1일까지 캐나다 ROM(로열 온타리오박물관)에서는 아우슈비츠의 역사와 유산에 초점을 맞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타이틀이 강한 경계심을 전해준다. "아우슈비츠, 얼마 전, 멀지 않은 곳(Auschwitz. Not long ago. Not far away)".

/ 김정학 (前 대구교육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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