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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고대 인더스강 유역의 상업적 도시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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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5. 11. 17:30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37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 비트포겔 수력 사회 이론은 타당한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 기름진 땅에 올망졸망 생겨난 영농 마을들이 횡적으로 조밀하게 연결되면서 급기야 전 지역을 아우르는 국가가 형성됐다. 수메르 문명에서 우루크와 같은 도시국가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시기는 대략 기원전 3500년경으로 소급되는데, 기원전 2334년경엔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군사적으로 병합하여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최초의 통일 제국이 출현했다. 바로 사르곤이 창건한 아카드 제국이다. 이후 1400여 년 동안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기원전 1895~1595)과 아시리아 제국 시기를 거쳐 갔다. 급기야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키루스(Cyrus) 2세(기원전 550~530)가 바빌로니아 제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메소포타미아는 독립적 문명이 아니라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이슬람 제국의 일부로 병합되었다. 이러한 일반적 서사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는 무려 3000년이나 지속되었다.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 유적지 모헨조다로의 풍경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 유적지 모헨조다로의 풍경
메소포타미아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도 사막 사이를 가로지르는 수만 리 물길 나일강도 해마다 범람하면서 강변에 검은 진흙을 다량 쌓아놓았고, 사람들은 하늘이 베풀어준 그 땅 위에 곡식을 심어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강을 따라 좁고 길게 들어선 영농 마을들이 공동의 수리 공사를 추진하면서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정치적 통합을 이루게 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여러 마을의 많은 인구가 힘을 합쳐 조직적으로 공동의 관개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관리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정치권력이 생겨났고, 그 결과 정교한 행정 시스템을 갖춘 고대 국가가 형성됐다. 기원전 3100년경 나일강 상·하류를 통합한 최초의 통일 국가가 출현했다. 그 후 2800년 가까이 정치적 통합력을 발휘하여 독자적 문명권으로 존속했던 이집트 문명은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정복당함으로써 그리스 문명권에 편입되었다.


두 문명은 대규모 조직적인 수리 공사 과정에서 고대 국가가 형성됐다는 비트포겔(Karl A. Wittvogel, 1896~1988)의 주장에 대체로 부합한다. 인더스강 유역의 하라파(Harappa) 문명과 중국의 상(商) 문명 역시 비슷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을까? 우선 인더스강부터 살펴보자.

◇ 하라파 문명의 발생

인더스 문명이나 인더스-사라스바티 문명이라고도 불리는 하라파 문명은 아리안족이 인도를 점령하기 전 오늘날 파키스탄에서 북인도 지역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평야를 배경으로 펼쳐졌다. 현재까지 고고학자들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대략 1500여 개의 정착지를 발굴했는데, 그중
에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가장 큰 도시의 유적지다.
청동 무희 상, 기원전 2300~1750년 모헨조다로 출토
청동 무희(舞姬) 상(像). 기원전 2300~1750년. 모헨조다로 출토. 10.8cm. 인도 뉴델리 박물관.
인더스강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힌두쿠시산맥과 히말라야산맥의 눈 녹은 물과 빗물이 합쳐져서 흘러가는 거대한 물줄기다. 높은 산맥에서 가파른 비탈 아래로 빠르게 쏟아지는 물길은 대량의 토사를 쓸어 담으며 수백 ㎞를 흘러간다. 나일강과 마찬가지로 자연 상태의 인더스강은 평지로 흘러들어 유속이 느려질 때면 영양분이 풍부한 고운 흙을 주변에 계속 쌓는다. 지금은 댐을 건설해서 홍수가 나지 않지만, 먼 옛날 인더스강 주변으로 해마다 홍수가 져서 광활한 범람원(汎濫原, floodplain)이 형성돼 있었다.

인더스강 유역으로는 일찍부터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밀과 보리가 전해져서 널리 재배되었고, 소, 양, 염소 등이 사육되었고, 인류사 최초로 닭을 가축화했다고 알려진다. 기원전 5000년경부턴 이미 면화를 재배했던 흔적이 보이고,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염색된 옷감 조각 등을 보면 이미 기원전 2000년 무렵이면 큰 규모로 면직물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대략 기원전 3000년에서 2500년 사이에 인더스강 유역에 복잡한 사회(complex society)가 들어서서 기원전 1900년경 몰락할 때까지 활달한 문명을 꽃피웠다. 인더스강 유역 천혜의 자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고대인의 수리 관리 덕분이었다. 강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농업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도시가 생겨나면서 계층적 분화도 일어났다.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된 하라파의 위치는 오늘날 파키스탄 동부 펀자브(Punjab) 지방이다. 모헨조다로는 하라파에서 서쪽으로 640㎞ 정도 떨어져 있다. 하라파 사회가 펼쳐졌던 고대 문명의 영토를 횡적으로 이어보면 길이가 무려 1500㎞나 된다. 오늘날 파키스탄에서 북인도까지 이어지는 130만㎢의 광활한 영토다. 한반도의 거의 6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다.

중앙아시아에서 옮겨 온 아리안족이 인도 아대륙으로 이주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1800년에서 1500년으로 추정된다. 하라파 문명은 기원전 1900년경 이미 환경 파괴나 모종의 다른 원인으로 무너졌다는 게 정설이다. 아리안족이 인도에 이르기 전이라면 하라파 사회는 드라비다족이 건설한 고대 문명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언어학적, 고고학적, 유전학적 연구가 계속 이어지지만, 인더스 문자가 아직도 해독되지 않은 상태라서 어떤 주장도 아직 사실로 확정되지는 않고 있다.

◇ 약한 정부, 강한 사회?

하라파 문명이 놀라운 이유는 관개 시설이나 상하수도 시스템이 도무지 고대 사회라 여겨질 수 없을 만큼 정교한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강력한 국가의 존재를 웅변하는 거석의 구조물이나 웅대한 정부 건물 따위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여러 도시를 잇는 상업 루트나 장마당의 흔적이 다수 발견되어 이 문명을 일으킨 동력이 강력한 정치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민간의 활발한 상거래에서 나오지 않았나 추측하게끔 한다. 물론 하라파나 모헨조다로에 남겨진 고대 도시를 보면 정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피라미드나 지구라트에 필적할 만한 거대하고 화려한 기념비적 구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도시를 둘러싼 성곽과 도심의 성채, 곡식을 쌓아두는 대규모 창고 정도에서 치안·방위·징세 등을 담당하는 정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파라오의 무덤이나 진시황의 궁터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존재가 두드러지지 않음에도 도시의 발달 정도는 그 어떤 고대 문명보다 앞서 있음은 놀랍다. 특히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쌍둥이 도시라 불릴 만큼 유사하다. 정부 건물 외에도 이 두 도시에는 장터, 신전, 공공건물, 넓게 자리 잡은 거주지의 흔적이 보이며, 무엇보다 동서와 남북으로 도로를 닦은 정방형의 계획도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략 2만~4만명의 인구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이 두 도시는 같은 도량형을 사용했을뿐더러 건축양식도 대체로 같았다. 하라파 사회는 총길이가 무려 1500㎞나 되는데도 벽돌 규격이 모두 일관되게 1:2:4의 비율을 보인다. 공장에서 구워낸 규격화된 벽돌이 공공건물은 물론 주거지 건축에 사용됐음을 보여준다. 반만년 전 인더스강 유역에 정방형의 도로망을 닦고, 벽돌을 사용해 다양한 건물을 세우고, 정교한 상하수도 시스템을 갖춘 말쑥한 도시가 건설됐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지만, 비트포겔이 말하듯 강력한 전제군주가 하향식 명령체계를 이용해 만든 질서 같지는 않다. 하라파 문명을 만든 원동력은 중앙집권적 정치권력이 아니라 민간의 활발한 무역과 상업 문화였기 때문이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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