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전역을 일곱 번이나 답사했다는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년경)처럼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년)는 이집트를 직접 찾아갔다. 아마도 그는 헬라스에서 뱃길로 소아시아(터기)와 레반트(시리아, 이스라엘 등지) 지역을 통해 이집트로 들어갔을 듯한데, 대략 2000㎞의 길이다. 이집트에서 나일강을 오르내리며 중요한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하니 그 동선이 족히 1000㎞는 넘을 듯하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에서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세밀하게 기록했다. 그 기록은 자신의 기념비적 저작 '역사' 제2권 '이집트 이야기'에서 실려 전한다. 피라미드의 위용에 압도당한 그는 피라미드가 "헬라스의 그 많은 신전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보다도 더 거대하다"고 썼다. 그때 그가 보고 놀랐던 피라미드는 이미 2000년 이상 그 자리에 세워져 있던 먼 고대의 유물이었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는 오매불망 서주(西周) 시대 주공(周公)을 흠모했다는데, 주공의 섭정기(기원전 1042~1035)는 공자가 태어나기 700여 년 전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헤로도토스가 2000여 년 전에 세워진 피라미드 앞에서 느꼈을 외경감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통일 국가 성립 직후에 세워진 피라미드는 거의 2600년 동안 고대 이집트 문명의 상징물로 굳건히 서 있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여러 이족의 침략에 무너져서 해체되었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집트를 한 나라로 묶는 역사적 구심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집트 문명의 존속 비결이 바로 그 웅대한 피라미드에 숨어 있다는 말은 문학적 비유만은 아니다. 모든 고대 문명은 거의 예외 없이 대규모의 기념비적 건물(monumental edifice)을 구축한다. 피라미드는 그 어떤 문명의 기념비적 건물보다 더 기념비적이다. 피라미드는 4600여 년 동안 산처럼 거대한 산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으니 또 무슨 말이 필요하랴. 히말라야산맥 없는 네팔은 네팔이 아니듯 피라미드 없는 이집트는 이집트라 할 수 없다.
|
기원전 2600년경 고대 이집트에 최초로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 왕조가 들어섰다. 그 이후로 무려 3000년의 세월 동안 고대 이집트 문명은 통일된 국가로서 존속되었다. 30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1000㎞가 넘는 나일강 유역을 정치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고대 이집트 국가 체제는 실로 놀라운 지배력과 지속력을 발휘했다.
물론 고대 이집트 국가 역시 권력 암투와 분열 상쟁의 시기를 겪었다. 3000년의 세월 동안 무려 31대의 왕조사가 펼쳐졌다. 이집트에서도 혼란기마다 지방 세력이 할거했었지만, 정치적 혼돈 속에서도 문명의 중심부에서 왕조가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통틀어서 서른하나의 왕조들이 이어졌다. 쉽게 말해, 한 집안이 한 왕조를 계속 이어서 3000년 지배한 게 아니라 31개의 왕조가 계속 교체되면서 이집트를 지배했다는 얘기다. 한 왕조당 통치 기간은 평균 100년도 채 못 되는데, 조대(朝代) 교체와 상관없이 통일 정부의 정통성은 승계되었고, 파라오가 지배하는 국가적 연속성은 유지됐다.
바로 그 점에서 고대 이집트의 왕조사는 조대(朝代)가 교체될 때마다 내전을 겪어야 했던 중국사와는 전혀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3000년간 이어진 고대 이집트 역사를 편의상 고(古)왕국(기원전 2575~2150) 시대, 중(中)왕국(1980~1630) 시대, 신왕국(1540~1070) 시대, 말기 왕국 시대 등 4번의 왕국 시대로 구분하고, 각 왕국 시대 말기마다 발생한 분열·혼란기를 일컬어 제1중간기(2150~1980), 제2중간기(1630~1520), 제3중간기(1070~715)라 부른다. 여기서 중간기는 중앙 권력의 약화나 외적 침입으로 지역 세력이 할거하던 정치적 혼란기였지만, 한(漢) 제국 붕괴 이후 등장하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220~589)나 당(唐) 제국 해체에 초래한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907~979) 등의 분열기와 달리 이집트의 중간기에는 그래도 중앙 권력은 어떻게든 유지됐다. 이집트 문명의 연속성을 설명하기 위해선 고대 이집트 국가가 발휘했던 정치적 지배력과 문화적 통합력을 살펴야만 한다. 과연 수천 리 나일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이집트를 하나로 묶는 구심력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장황하게 복잡다단한 고대 이집트의 정치사를 약술(略述)하는 이유가 실은 지금도 이집트 문명의 상징물로 남아 있는 피라미드의 비밀을 다시 논하기 위함이다. 그 비밀을 풀기 위해선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 피라미드는 거의 모두가 최초의 통일 국가가 들어선 후 초기 수백 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피라미드를 세웠기에 고대 이집트는 3000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단일 문명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면 과언일까?
|
4600년 전 건축된 이집트 기자(Giza)의 대(大)피라미드는 거대한 사각뿔의 인공산이다. 이 장엄한 피라미드를 제작한 고대 이집트인들은 길이 230m의 정방형 기초 위에 일정한 크기로 자른 230만여 개 화강암과 대리석을 정교하게 짜맞춰서 146.4m 높이까지 촘촘 쌓아 올렸다. 경사면의 각도는 51.84도이다. 보통 층계의 각도가 30~37도 정도이니 사람이 오르기엔 심하게 가파르다. 지금은 피라미드 표면이 훼손되어 층계처럼 보이지만, 본래는 곱게 갈린 백색 대리석으로 층계 사이 틈들이 말끔히 덮여 있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9.5m에 달하는 거대한 관석(罐石, capstone)이 놓여 있었다고 여겨진다. 피라미드의 위용으로 미뤄보건대 피라미드의 정점엔 영롱하게 햇빛을 되쏘는 뭔가 보석 같은 물체가 있었을 듯하다. 기록이나 물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확언할 순 없으나.
고대 이집트인들은 대체 왜 그토록 웅대한 피라미드를 지어야만 했을까? 고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피라미드를 파라오의 무덤이라 생각한다. 진정 피라미드가 거대한 무덤이라면 피라미드의 비밀을 풀기 위해선 삶과 죽음에 관한 고대 이집트인의 일반적 생각을 알아내야만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사관을 탐구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는 당연히 장구한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서 지금까지 남겨진 수백 구의 미라들이다. 사체를 미라로 만들어 영구 보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고 나면 영혼이 남겨진 사체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이집트인들이 사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는 바로 그 지역이 매우 건조한 사막이라는 점과 무관할 수 없다. 건조한 사막 모래 밑에 시신을 묻으면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서 생선포처럼 바싹 말라버린다. 습한 지역에서 시신의 보존은 불가능하지만, 사막 모래바람 속에서는 시체가 썩지 않고 미라로 바뀌어서 생전의 형상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하여 고대 이집트에선 미라를 만드는 장례 풍습이 널리 퍼졌고, 덕분에 수백만 구의 시신이 모랫더미를 들춰내고 기반(基盤, bedrock) 아래 묻힌 채로 미라가 되었다. 이집트의 독특한 장례 풍습이 피라미드라는 장엄한 무덤이 생겨난 종교적 배경이라 할지라도 그것만으론 절대로 피라미드의 역사적 의의를 밝힐 수가 없다. 피라미드는 사자의 분묘였지만, 그 이상으로 살아 숨 쉬는 모든 이집트인을 하나로 묶는 상징물이었다. 거대한 문화적 동심결이었달까.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