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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김주원의 ‘요즘 미술’] 태양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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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1. 16. 17:28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리투아니아관 전시 <태양과 바다> 장면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리투아니아관 전시 '태양과 바다'의 한 장면. /출처=See & Sun 홈피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은 2019년 그해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2019)에서 소개된 리투아니아 국가관의 '태양과 바다(Sun and Sea)'를 꼽았다. 베니스비엔날레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일반적인 미술작품의 형태가 아닌 오페라 형태의 퍼포먼스다. 리투아니아 출신 아티스트 루길레 바르즈쥬카이테(1983∼), 바이바 그라이니테(1984∼), 리나 라펠리테(1984∼)가 공동 창작한 작품이다. 동시대 미술 신(scene)에서 전시장에 등장한 오페라가 그리 생경할 것은 없지만, 러닝타임 60분 분량인 데다 하루 8회 배우들이 대중 앞에서 직접 공연했다고 하니 관람자의 작품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퍼포먼스였음은 분명하다.

사실, 오페라 퍼포먼스 '태양과 바다'는 2017년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국립미술관에서 초연된 이후, 베니스, 노르웨이, 스위스, 독일, 덴마크, 뉴욕 등 세계 주요 도시 미술관 등에서 공연되었다. 지난 5월 향수 브랜드로 유명한 탬버린즈의 단독 초청으로 국내에서도 공연되어 2030 세대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은 바 있다.

실내의 인공 해변이 무대인 '태양과 바다'는 대본, 조명, 30톤의 모래와 해변 조성을 위한 세트, 24명의 배우, 음향(장비) 등이 필요한 스케일이 매우 큰 작품이다. 기존 오페라와는 달리 영웅이나 주인공이 특정되지 않고, '태양과 바다'가 있는 해안가 모래사장 위 평범한 휴양객들의 일상 속 대화와 서정적 아리아, 합창이 아름답지만 암울하게 어우러진다.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는 위층 객석보다 한두 층 낮게 설치되었고, 휴양객으로 분한 배우들은 무대 위를 덮은 모래 위 백사장을 걷기도 하고 의자나 수건에 기대거나 누워 쉬기도 하며 샐러드를 먹거나 온종일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뜨개질을 하기도 하고 플라스틱 플라잉 디스크 던지기 등 평범한 사람들의 오락과 여가, 지루함과 사랑, 일상의 걱정 등이 뒤섞인 해변의 하루를 보여준다. 이 익숙한 듯 평범한 배우들의 대화는 노래가 대신하지만, 우리네 일상과 별반 차이가 없다.

"나에게 선크림을 건네줘, 다리 좀 발라야 해…/ 나중에 벗겨지고 갈라지고, 터질 테니까./ 건네줘, 내가 발라줄게…/ 안 그러면 너는 바닷가재처럼 빨개질 거야…/ 건네줘, 내가 발라줄게…"

"난 정말 느려질 수가 없어요,/ 동료들이 나를 무시할 거니까요./ 그들은 내가 의지가 없다고 말할 거예요./ 그러면 나는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느끼게 되죠./ 피로, 피로, 피로, 피로…/ 피로(exhaustion), 피로, 피로, 피로…"

보사노바 리듬으로 자외선 차단제를 노래하고, 피로에 지친 워커-홀릭 샐러리맨의 하소연이 들려온다.

"사람들은 1년 내내 계획을 세웠어. / 딱 열흘 동안의 휴가를 위해서 / 1년에 딱 한 번 가지./ 지금 땀 범벅이 되어 공항 대기실에 앉아 있어. / 황금빛 뜨거운 모래는 브로셔 속에만 존재해./ 화산은 예상치 못하게 폭발했어, (중략) 화산재가 공항에 도달하기 전에,/ 비행기는 검은 구름에 휩싸였어.…"

"나는 며칠 동안 머물렀어, 공포와 재가 사라질 때까지. 공항 마비가 끝날 때까지. 여기 있는 내 친구가 그의 형을 소개해 줬어: 우리 함께 있어!… 우리 함께 있어!…"

예상치 못한 화산 폭발과 그로 인한 공포를 하소연하고, 그 틈에서 싹튼 사랑을 노래한다. 과잉영양화(eutrophication) 탓에 대량증식한 녹조류(해조류)로 인해 숲처럼 변해버린 바다, 하얗게 변해가는 산호초, 해수면 상승, 쓰레기로 가득 찬 오염된 바다와 같은 인류가 직면한 실존적 위기를 노래로 들려준다. 노래와 별개로 해변에서 나누는 휴양객들의 대화는 이 같은 위기와 공포, 재앙에 무뎌진 우리의 모습을 재현한다. 익숙한 일상이 어느 순간 낯설게 다가온다면! 그 낯선 순간이 일상이 된다면! 여러 가지 문제를 시사하는 이 작품의 구상은 바이바 그라이니테가 리투아니아 숲속을 걷다가 얻은 통찰에서 비롯되었다.

바이바는 12월 겨울 어느 날 숲속을 산책하던 중 잘 자란 살구 버섯을 발견하게 되었다. 리투아니아의 기존 겨울 날씨에서는 결코 자랄 수 없는 살구 버섯을 발견한 바이바는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비정상적으로 변해버린 낯선 환경을 알아차린 바이바의 산책은 오페라 퍼포먼스 '태양과 바다'를 제작하게 하였고 불현듯 찾아올 낯선 일상이 평화와 위선을 가장한 채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큐레이터·한빛교육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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