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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에 참석한 젠슨 황 엔디비아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을 한껏 추켜세웠다. "한국에게 지금은 매우 특별한 시기다. 플랫폼 전환 성공에 필요한 3가지 핵심 요소를 다 갖춘 나라는 지구상에 거의 없다. 한국은 소프트웨어에서 풍부한 전문성과 인재를 갖고 있다. 여기에 더해 기술력과 과학적 역량 제조 능력이 뛰어나다." 그는 더 나아가 "한국이 소프트웨어 및 제조 역량을 결합하면 로보틱스의 활용 기회가 많아지고 이게 피지컬 인공지능(AI)의 차세대 모델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공개된 장소에서 치맥을 하면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화술은 세계적 CEO라는 이미지를 한국인에게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엔디비아는 한국에 AI 생태계를 조성하려 한다. 이제 한국은 AI 주권 국가, AI 프런티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말로만 한국인의 환심을 사려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의식하기라도 한 걸까, 삼성과 SK그룹, 현대차그룹에 각각 최대 5만개의 GPU를, 네이버에는 6만개의 GPU를 공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AI 리더가 될 토대를 마련하게 됐다고도 했다.
카페와 식당, 그리고 반도체. 얼핏 보면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이 모두 분명 한류 덕 아니겠는가. 우리 한국인의 농축된 잠재력이 한류로 분출한 덕이다. 그런 한류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가수들로부터 시작됐을까, 아니면 예술인들로부터 시작됐을까.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한류가 세상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남아 관광객뿐만 아니라 미국·유럽 등지에서 한국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물밀듯 몰려오는 것만 봐도 그렇다. K-팝·K-드라마 등 K 이니셜만 붙이면 세계인이 열광하는 시대가 됐다. 국민은 한류에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품격을 지키려고 자발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자제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정치로 눈을 돌리면 상황이 심각하다. 정치가 국민의 자긍심에 상처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국민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바로 특검 정국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임 정부에서 주요 역할을 한 피의자들이 속속 등장한다. 12·3 비상계엄 관련 장관 등 현직 고위공무원들이 잇달아 영어의 몸이 되고 있다. 전직 대통령 부부의 재판으로 국민의 일상이 편치 않다. 이재명 정부는 계엄에 동조한 공직자들에 대한 인사 조치 등을 위한 TF를 만들었다. TF의 활동이 공직자 몸 사리기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공직자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국가를 위해 일한다. 이게 흔들리면 자신에게 맡겨진 공직을 등한시하기 마련이다. 공직자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게 후환을 없애는 지름길이라는 확신이 들 때 제 할 일을 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언제부터인가 정당이 내건 상대방 비난 일색의 현수막이 거리 곳곳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수험생 응원 현수막, 추석 귀경 인사 등 구태여 정당까지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을 우리의 정당은 하고 있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3년 전 국회가 관련법을 개정하면서부터 현수막 홍수가 시작됐다고 한다. 급기야는 이재명 대통령이 나서 "길바닥에 저질스럽고 수치스러운 내용의 현수막이 달려도 정당이 게시한 것이어서 철거를 못 한다"며 정당 현수막 규제를 위한 법 개정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지시가 어떤 배경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는 현시점에 확실치 않지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렇게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가 아직 선진국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국민의 마음은 불편하다.
공직자들이 마음 놓고 공직에 종사하면서 국가 발전과 한류 확산 등에 기여하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국민은 성숙한 정치인이 만든 제도와 법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가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그게 결국 한류로 승화되고 있지 않은가. 시드니 한인교포와 젠슨 황이 언급했던 대로 지금 한국은 한류를 바탕으로 국운 상승의 호기를 맞고 있다. 실기(失期)하지 않도록 정치권이 발벗고 나서야 한다. 제도와 법을 정비해 최소한의 공적 간섭을 바탕으로 민간을, 한류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 과거는 신속히 정리하되 미래를 향한 국가적 동력까지 망가뜨려서는 곤란하다. 한류는 과연 영원할까.
/이경욱 논설심의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