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방 고양이’의 마지막 인사에서 ‘노인의 꿈’으로 이어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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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짧아진 대학로의 저녁, 윤봄의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따뜻하다. 오랜 시간 무대와 함께한 배우에게 '끝'은 단순한 종착점이 아니라 다음 이야기를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그는 곧 새로운 작품 '노인의 꿈'을 통해 또 다른 인물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이제 막 한 무대를 마무리한 배우가 다시 새로운 무대를 준비하는 이 순간, 윤봄은 자신을 "아직 배움의 길 위에 있는 사람"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의 언어와 태도 속에는 이미 한 배우로서의 내면의 리듬이 선명히 깃들어 있었다.
윤봄이 연기를 처음 만난 건 중학생 시절이었다. 방학 숙제로 연극을 보러 갔던 그날, 객석에서 바라본 무대의 공기가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무대 위 배우분들의 표정과 호흡, 그분들이 만들어내는 공기가 객석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어요. 그 순간 문득 '아, 저거 해야지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날 이후로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렸어요. 그 공기를 다시 느끼고 싶어서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연기에 대해 아는 것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벅차오르는 마음이 생겼고, 그 감정이 지금까지 윤봄을 이끌어왔다. 그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배울 게 많지만, 그날 처음 느꼈던 마음을 잃지 않고 걸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의 연기는 그래서 계획된 진로라기보다 감정의 자각에서 시작된 여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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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험들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연기의 감정선으로 이어졌다. 윤봄은 "연기를 할 때 이 모든 경험이 다 연결되어 있구나 하는 순간을 자주 느껴요. 그래서 연습할 때도 감정을 몸으로 표현해보거나, 대사를 노래처럼 흘려보는 습관이 있어요. 그게 제 방식이에요."라고 말했다.
배우에게 필요한 것은 목소리나 동선 이전에 감정의 온도를 감지하는 능력이다. 윤봄은 그 감각을 오랜 시간 예술을 통해 다듬어왔다.
"배우는 결국 자신의 몸과 목소리라는 악기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직도 배우는 중이지만, 지나온 모든 예술의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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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번 무대를 하나의 공연이 아니라 관객과 작품 모두에게 드리는 마지막 편지라고 표현했다. 정은 역으로 무대에 선 그는 밝고 솔직한 인물의 내면을 온전히 이해하려 했다. "정은이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때그때 진심으로 마주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에요. 저도 그 용기를 조금씩 배운 것 같아요. 정은이를 연기하면서는 정말 많이 웃었어요. 대사 중에 제가 실제로 공감되는 말이 많았거든요. 공연 중에 진심으로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 있으면, 그때는 '아, 이게 내가 이 인물을 이해하고 있구나' 하고 느껴요."
그러나 이 배역은 그에게 결코 쉬운 도전이 아니었다. "처음엔 정은이 너무 어렵고 두려웠어요. 용기 있게 등장하고, 크게 감정을 표현하는 인물이잖아요. 저와는 많이 달라서 작은 동작 하나까지도 조심스러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봄은 매일 같은 무대를 반복하며 성장했다.
"매일 공연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예전엔 무서워서 못 하던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어요. 그때 공연이 나를 자라게 하는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서울 출신인 그는 사투리를 익히는 과정에서도 진심을 다했다. "억양보다 더 어려웠던 건 그 지역 사람들의 마음과 결을 이해하는 일이었어요. 다행히 공연팀에 경상도 출신 선배님들과 연출님이 계셔서 정은이의 상황마다 사투리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세세하게 도와주셨어요." 그는 사투리를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정은의 마음으로 말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 진심이 관객에게 전달됐기에, 관객들은 마지막 시즌의 정은을 오래 기억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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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난 뒤 찾아오는 공허함 역시 윤봄에게는 하나의 감정적 의식이다. "그날의 감정을 억지로 털어내지 않아요. 그 여운도 제가 지나온 여정의 일부니까요. 음악을 들으며 감정이 자연스럽게 가라앉도록 둬요. 그러다 보면 새로운 인물을 만날 마음의 자리가 생기더라고요." 그의 말 속에는 무대를 떠난 배우의 외로움과 그럼에도 감정을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가 함께 배어 있다.
'화염(그을린 사랑)'에서 윤봄은 깊은 감정의 인물 사우다를 연기했다. 그는 감정을 억지로 만들지 않으려 한다. "인물의 과거, 상처, 결핍, 관계를 하나하나 살피며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까를 찾아가요. 그 이유를 이해하다 보면 감정은 자연스럽게 따라와요." 그는 진심으로 이해한 감정만이 무대 위에서 살아남는다고 믿는다.
윤봄은 즉흥 상황에서도 감정의 중심을 놓치지 않는다. '행오버' 같은 소극장 공연에서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늘 존재한다. "저는 그런 순간을 즐기려고 해요.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무대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더 살아나요. 당황해도 흐름을 깨지 않고 자연스럽게 극 안으로 끌어들이면, 그 순간이 정말 짜릿하죠."
그는 자신이 받은 관객의 피드백을 고스란히 마음에 새긴다. "'연기가 오히려 미모에 묻혔다'는 리뷰를 받은 적이 있어요.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그 안에 외적인 것보다 연기를 봤다는 의미가 느껴졌어요. 그 말이 지금처럼 꾸준히 가라 하는 조용한 응원처럼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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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애 역에는 김영옥, 김용림, 손숙 등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이름을 올렸고, 봄희 역에는 하희라, 이일화, 신은정이 나란히 선다. 상길 역에는 남경읍, 박지일, 김승욱이, 채운 역에는 강성진, 이필모, 윤희석이 출연한다. 그리고 윤봄은 진지희, 최서윤과 함께 '꽃님' 역을 맡았다.
다양한 세대의 배우들이 한 무대에서 호흡을 맞추는 이번 공연은 작품이 지닌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윤봄에게 이번 무대는 단순한 참여를 넘어 배움과 확장의 자리다.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이번 작업에서 그는 선배 배우들의 리듬 속에서 자신만의 색을 쌓아가고 있다. '옥탑방 고양이'에서 보여준 솔직한 밝음과 진심이 '노인의 꿈'의 섬세한 결로 이어질 때, 윤봄이라는 이름은 또 한 번 다른 온도를 얻게 될 것이다.
윤봄이라는 배우는 지금도 성장 중이다. 감정을 온몸으로 품어내던 그날의 떨림처럼, 오늘의 윤봄은 여전히 무대 위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걸음으로, 그는 또 한 번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