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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리더십: 신보수주의의 챔피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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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7. 20. 18:36

-레이건, 라디오가 저무는 시대에 매일 라디오 정치평론을 통해 노령의 나이에도 정치적 힘을 발휘
-취임사에서 "현 위기에서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가 문제"라고 선언
-관제사노조가 불법파업을 하자 이들이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했지만 단호하게 이들을 해고하고 군인들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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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로널드 레이건은 두 번째 주지사 임기가 끝나가면서 자기가 애용하는 주제로 정치적 메시지를 넓혀나갔다. 1974년 1월 '보수정치행동회의(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nference, CPAC)'에서 행한 그의 첫 연설에서 그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을 통해 갱신된 이미지인 '언덕 위의 도시'라는 청교도 공동체에 대한 존 윈스로프(John Winthrop)의 기도문을 인용했다. 그는 "두 대양 사이에 놓인 거대한 대륙은 자유를 사랑하고 특별한 용기를 소유한 사람들을 위한 어떤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정부는 실패할 수 있겠지만 미국인들은 실패하지 않고 있다고 레이건은 주장했다. 그는 65세의 나이로 인해 그의 정치적 경력이 끝난 것으로 비쳤다. 그는 3번째 주지사 출마는 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또 상원 출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워터케이트 사건 중에도 닉슨 대통령에게 충성했다. 그러나 제럴드 포드(Gerald Ford) 부통령이 닉슨의 대통령직 사임 후에 대통령직을 계승하자 레이건의 나갈 길이 막혔다. 1974년 9월 포드 대통령이 닉슨을 사면하자 예상 못 한 문이 열렸다. 그 사면 발표는 포드 대통령에 대한 처음의 선의를 날려버렸다. 게다가 1975년 미국의 불명예스러운 베트남 철수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포드의 최악 결정은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를 부통령으로 지명한 것이었다. 포드는 레이건에게 교통 혹은 통상장관, 아니면 영국 대사직을 제안하여 레이건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레이건은 이 모든 제안들을 거부했다.

1975년 가을, 레이건은 대통령에 출마하길 원했다. 그는 국가언론클럽(National Press Club)에서 출마를 선언하면서 자기는 워싱턴 기존세력의 일원이 아니라 정부제도에 대항하는 동료시민들을 대변하는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 포드의 지명이 분명해지자 공화당 전당대회는 레이건을 부통령 후보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드는 캔자스주의 로버트 돌(Robert Dole) 상원의원을 선택했다.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포드가 민주당의 지미 카터(Jimmy Carter) 후보에게 패배하자 레이건은 1980년에 있을 공화당 대통령 후보군 가운데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그는 미국에서 당시 가장 강력한 뉴스매체인 CBS 저녁방송의 보수적 평론자로 초대받았지만 이것을 거절했다. 레이건은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자주 보는 걸 지겨워할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대신에 그는 1975년 대통령 후보 선언 때까지 매일 라디오 평론을 재개했다. 매일 라디오 평론은 그가 행하는 연설과 함께 공화당에 영향을 계속해서 미치는 방법이었다. 가장 중요하게도 그의 연합라디오 출현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후보로 다시 나서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주장하는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정치적 힘을 유지했다. 레이건의 정치평론은 마침내 286개의 방송을 타고 또 전국적으로 226개의 신문에 칼럼이 실렸다. 합쳐서 레이건은 2000만명의 청중에 접근할 수 있었다. 라디오가 저무는 시대에 레이건은 라디오의 끈질긴 힘을 간파했다. 레이건은 보이지 않는 인간 목소리의 친근감과 청취자들이 그것으로 상상할 그림을 채우는 방법을 이해했던 것이다.

레이건 정치평론의 대부분은 미국의 군사적 취약성에 관한 것이었다. 레이건은 공산주의를 궁극적으로 미국의 도덕적이고 군사적인 도전을 견디지 못할 무능하고 우스꽝스러운 체제로 보았다. 그는 전쟁 없는 미국의 승리를 상정했다. 소련에 대한 레이건의 그런 낙관주의는 순진하게 들릴 수 있었다. 그는 미국이 불충분한 활력으로 냉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미국의 근본적 교리들에 의심을 품었다. 레이건은 소련의 지배를 전복하길 원했기 때문에 봉쇄정책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핵억제정책이 미국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도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핵억제정책을 의심했다. 그는 상호확정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MAD)의 개념을 도덕적으로 불쾌하고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대안이 무엇일까? 그는 그의 비서인 마틴 앤더슨(Martin Anderson)이 제안한 '보호적 미사일체제(protective missile system)'의 아이디어를 좋아했다. 레이건은 비준되지 않은 SALT II 조약과 함께 기존의 ABM조약을 반대했다. 그는 자기의 친구인 로렌스 베일리슨(Laurence Beilenson)이 쓴 책, '조약의 함정(The Treaty Trap)'을 빈빈히 추천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국가들이란 그것이 자국의 이익이 되는 동안에만 타국과의 합의를 준수하며, 따라서 평화조약이 결코 평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1980년 레이건의 선거운동이 시작했다. 공화당의 두 선두 주자인 레이건과 부시는 토론에 동의했다. 3일 후 레이건이 큰 차이로 부시를 이겼다. 부시가 러닝메이트(running mate), 즉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레이건은 현직 대통령인 지미 카터를 유약하고 무능한 인물로 몰아붙였다. 카터 대통령은 이란의 인질사건과 에너지 위기, 그리고 깊어 가는 불경기로 어려움에 처했다. 반면에 레이건은 미국의 최선의 날들이 미래에 있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향수 어린 민족주의를 자극했고 당시 현안인 카터의 파나마운하 포기를 집중 공격했다. 레이건은 선거일 2주일 전에 클리브랜드(Cleveland)에서 열리는 카터와의 단 한 번의 토론에 동의했다. "당신은 4년 전보다 더 잘살고 있습니까?" 레이건의 이 질문이 히트를 쳤다. 레이건은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로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레이건은 1981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정부가 국민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정부를 갖고 있다…우리 정부는 국민에 의해서 승인된 것 외에는 어떠한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 현 위기에서 정부는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가 문제다"라고 선언했다. 레이건은 의회에 상당한 군사비 지출의 증액, 3년에 걸친 개인소득세의 30% 축소, 그리고 최고자본 소득세 비율의 20%까지 인하 등을 요구했다. '레이건 경제학(Reganomics)'은 4개의 중요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감세, 국내비용 삭감, 탈규제 실시, 그리고 통화팽창을 잡기 위한 금융정책의 사용이었다. 3월 30일 레이건이 워싱턴의 힐튼호텔에서 미국의 노조연합 AFL-CIO의 목수 분과 오찬연설을 막 마치고 리무진을 타려는 순간, 총소리가 울렸다. 비밀경호원들은 그를 차속으로 밀어 넣고 그곳을 빠져나가면서 레이건이 가슴에 총을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으로 그를 급히 이송했다. 엄청난 고통과 호흡곤란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은 응급실의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길 고집했다. 응급실 안에 들어서자 그는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수술 후 의식을 찾자마자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를 보살피는 간호사에게 자기 손을 잡고 있는 게 누구인가를 물으면서 영부인 낸시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몇 분 후에 그는 부인 낸시에게 "여보, 몸을 숙이는 것 잊었어"라고 말했다. 수술에 들어가려는 외과의사들에게는 그들이 공화당원이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레이건의 의사들은 대통령의 생명은 위험하지 않으며 그가 수술 후에 빠르게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위험한 상태에 놓이지 않았다. 그가 병원에서 집으로 퇴원하자 그는 신체적으로 약해졌지만 정치적으로는 강해졌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가 보인 우아함은 대중들이 그를 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4월 초 그에 대한 지지율은 67%로 상승했다. 팁 오닐(Tip O'Neill) 하원의장은 대통령이 영웅이 되었다며 레이건만큼 인기 있는 사람과 논쟁할 수 없다고 새로운 현실을 인정했다. 6월 말 의회는 레이건의 예산안을 통과시켰으며, 한 달 후 하원은 레이건의 수정된 세금법안도 승인했다.

레이건은 종종 자기가 과거 노조의 의장이었다는 것을 언급할 만큼 노동조합의 반대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공공 고용인들이 공공질서와 안정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파업할 권리가 없다는 믿음을 과거 주지사 시절부터 굳게 가지고 있었다. 이 믿음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1980년 선거에서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던 직업관제사조직(the Professonal Air Traffic Controllers Organization, PATCO)이 교통부의 새 계약의 제안을 거부하고 난 후 PATCO 노조위원장이 불법파업을 선언했다. 레이건은 관제사들이 임용서약을 위반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48시간 내 복귀하라는 최후통첩을 발했다. 그들이 파업을 계속하자 레이건은 1만1000명의 관제사들을 해고하고 그들을 군인들로 대체했다. 대규모 비행 취소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불법에 맞선 그의 결정은 널리 인기 있는 행동으로 드러났다. 레이건 대통령의 임기 첫해는 그에게 그런 대로 성공적인 한 해였다. (계속)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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