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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북한 노동자들이 생산한 중국산 바지락이 한국으로 대량 수입됐다는 사건이 있었다. 처음엔 420톤 규모로 알려졌지만, 미국의 금융제재·공급망 전문 분석 회사 '사야리(Sayari)'의 데이터 분석 결과, 실제로는 10배 이상인 4350톤에 달했다. 중국 업체 5곳이 3년간 158회에 걸쳐 한국의 36개 업체에 수출한 내역까지 정확히 밝혀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사야리는 70억개의 데이터와 7억6000만개의 회사, 7억 5000만명의 정보, 38억개의 관계를 분석한다고 한다. 전 세계 무역과 관련 데이터를 모두 끌어모아 무역의 실핏줄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와 법무부 등 미국의 제재 관련 부서는 모두 이 회사의 정보를 구독하고 있다. 미국엔 이런 회사가 사야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팔란티어도 자금세탁과 제재 스크리닝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으며, 다우존스, 무디스 등 대기업과 수많은 소프트웨어 업체들까지 제재 스크리닝 사업을 하고 있다.
미중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세계통상질서는 기술과 금융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특히 수출통제와 금융제재가 연계되는 구조가 강화되면서,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의 리스크는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2022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내 공장에 대한 장비 업그레이드가 제한됐고, 올해는 트럼프 정부가 대중 저사양 AI칩 수출도 금지했다가 다시 일부 허용하는 등 정책 변동이 심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수출통제가 금융제재와 직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최근 행정명령을 통해 수출통제를 위반한 제3국 기업에 금융제재를 부과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단순한 수출규제 위반이 전체 자금 흐름을 차단하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의 제재 위반 정보를 알려주고 우리 정부 차원에서 미리 해결하도록 하는 경우도 많다. 한 외교 당국자는 "일반의 생각보다 많은 제재 위반 명단이 넘어온다"고 한다. 실제로 최근 한국에서 러시아로 불법 수출한 사례의 판결문에는 "공무원들의 현장 검증으로 업자가 수출의 위법성을 명확히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있었다. 미국이 미리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러시아 제재는 정치적 이유로 미루고 있지만, 이란에 대해서는 거의 매주 신규 제재가 발표되고 있다. 이란 원유를 몰래 수입하는 중국의 소형 정유사부터 홍콩, 싱가포르, 튀르키예, 인도 등 전 세계 기업들이 제재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은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글로벌 공급망에 깊이 연결된 구조 탓에 의도치 않은 제재 위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고, 금융기관은 제재 리스크를 우려해 정당한 거래마저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 국내외 금융회사들이 수천억 원의 벌금을 부과받은 사례는 금융권의 과잉 대응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는 기업에 대한 제재 리스크 보호장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재 무역보험과 수출금융 제도는 대부분의 국제 제재에 따른 손실을 보장하지 않는다. 기업이 고의나 과실이 없어도, 복잡한 공급망 속에서 발생한 제재 위반에는 사실상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제는 우리 정부와 기업, 금융회사의 제재 리스크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시급하다. 우선, 기업과 금융기관은 제재준수프로그램(Sanctions Compliance Program)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법적 요구사항이 아니라 기업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고 있다. 거래 상대방에 대한 철저한 실사와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또한 정부와 금융기관, 기업 간 협력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정보공유 플랫폼을 구축하여 기업이 제재 위험을 사전에 확인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하고, 전문가 풀을 조성하여 중소기업이 제재 상황에 처했을 때 전문가의 자문을 쉽게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제재대응기금'의 도입이 필요하다. 기존 제도는 피해 발생 후에도 적절한 보상이 어렵기 때문에, 기업이 사전에 대응할 수 있는 자원을 마련해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 기금은 제재 대응에 필요한 법률 자문, 컴플라이언스 구축, 조사비용 등을 보조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
미중 무역전쟁은 단기적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형태의 수출통제와 제재가 등장할 것이다. 정부는 '위기 이후의 보상'이 아니라, '위기 이전의 준비'에 투자해야 한다. 제재 대응은 선택이 아닌 생존전략이며, 우리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될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대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필자 소개>
이대기 박사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금융연구원에 재직 중이며 한국주택금융공사 비상임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