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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거부’서 “대통령께”로… 베네수엘라 부통령의 급선회와 트럼프 압박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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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승인 : 2026. 01. 05. 14:37

로드리게스, 전면 대치 하루 만에 "협력하자"
트럼프 경고 직후 유화 제스처로 급선회
성명서 수신인 '트럼프'… "전쟁 아닌 평화 원해" 백기 투항
시험대는 석유… 베네수엘라 주권과 미국 실리의 충돌 지점
VENEZUELA-US-CONFLICT-CRISIS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권한대형 겸 부통령(가운데)이 4일(현지시간) 카라카스 부통령실에서 진행된 각료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로페스 국방부 장관(왼쪽 두번째)·디오스다도 카벨로 내무·사법·평화부 장관 (오른쪽 세번째) 등에게 발언하는 모습으로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대변인실이 공개한 사진./AFP·연합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미군 특수부대의 전격 작전으로 체포돼 미국에 수감된 이후, 베네수엘라의 실질 권력을 쥔 델시 로드리게스 대통령 권한대행 겸 부통령이 미국을 향해 공개적인 '협력' 메시지를 내놓으며 정국이 전환 국면에 접어들었다.

당초 "미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겠다"며 전면 대치를 외쳤던 로드리게스 대행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마두로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최후통첩성 경고 수시간 만에 사실상 백기를 든 모양새다.

베네수엘라 과도 지도부가 대상·형식·어조를 바꾼 유화적 메시지로 선회하면서 '포스트 마두로' 국면은 대치에서 거래의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께"…로드리게스 베네수 대통령 권한대형, 수신인 명시 공개 협력 요청

로드리게스 권한대행은 4일(현지시간)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영어 성명 서두에서부터 수신인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께(To President Donald Trump)'라고 명시했다. 불특정 국제사회나 미국 정부 일반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라, 백악관의 결정권자 개인을 직접 겨냥한 외교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는 성명에서 "우리는 미국이 국제법의 틀 안에서 공동 발전을 지향하는 협력 의제를 중심으로 우리와 함께하기를 요청한다"고 밝힌 뒤,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리 국민과 우리 지역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와 대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호소했다.

이어 "베네수엘라는 평화와 평화적 공존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한다"며 "주권 평등과 내정 불간섭을 전제로, 미국과 베네수엘라가 균형 있고 상호 존중하는 국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우선시한다"고 강조했다.

외교가에서는 성명 내용보다 형식의 변화 자체가 메시지라는 평가가 나온다. 수신인을 특정해 공개 성명을 낸 것은, 협상의 창구가 '미국'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임을 공식 인정한 행보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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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왼쪽)이 2019년 1월 23일(현지시간) 카라카스의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발코니에서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과 함께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AFP·연합
◇ 로드리게스 대형 "대통령은 오직 마두로"에서 '조건부 협력'으로… 극적인 태세 전환

이번 성명은 불과 하루 전까지의 강경 노선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로드리게스 권한대행은 마두로 체포 직후 열린 비상 내각회의와 TV 연설에서 "우리의 유일한 대통령은 니콜라스 마두로"라며 석방을 요구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베네수엘라 국정 '운영(run)' 구상에 대해서도 "베네수엘라는 어떤 나라의 식민지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디오스다도 카베요 내무장관도 "여기에는 단 한 명의 대통령만 존재한다"며 친마두로 진영의 결속을 다졌다. '식민지 거부'와 '주권 수호'는 내부 결집을 위한 핵심 구호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결적 언어는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압박 이후 급속히 누그러졌다.

마두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가운데)이 3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시 마약단속국(DEA)으로 연행되는 모습으로 백악관 신속대응팀 47의 엑스(X·옛 트위터) 동영상에서 캡처한 사진./AFP·연합
◇ 트럼프의 최후통첩 "마두로보다 더 큰 대가"… '조건부 생존' 압박

트럼프 대통령은 4일 미국 시사매체 더애틀랜틱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로드리게스 권한대행을 직접 겨냥해 "그녀가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매우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아마 마두로보다 더 큰 대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옳은 일'의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전날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저택에서 언급한 △미국의 베네수엘라 국정 개입 △미국 석유 기업의 석유 인프라 재건·운영 참여에 대한 협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공개적 압박 이후 나온 로드리게스 권한대행의 성명은 정권 존속을 전제로 한 유화적 출구 전략으로 읽힌다.

◇ 트럼프의 선택, '민주 상징' 아닌 '통제 가능한 권력'

트럼프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전략은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이념보다 통제 가능성과 실익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로드리게스가 베네수엘라 핵심인 석유 산업을 관리해 온 점이 트럼프 행정부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며 "중재자들은 그녀가 미국의 미래 에너지 투자를 보호하고 옹호할 인물이라고 설득했다"고 전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에 대해 "국내에서 지지 기반도 존중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차기 지도자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베네수엘라 문제를 '가치'가 아닌 '거래'의 문제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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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푸에르토 카벨로에 있는 국영 석유회사 PDVSA의 엘 팔리토 정유소로 2024년 2월 10일(현지시간) 찍은 사진./로이터·연합
◇ 시험대는 석유… '협력'의 실질적 기준

로드리게스 권한대행의 협력 선언이 실제 정책 변화로 이어질지는 세계 최대 매장량을 가진 베네수엘라 석유 자원의 개방 여부에 달려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NYT는 미군이 이미 베네수엘라산 원유 수출을 차단하기 위해 유조선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며 "베네수엘라 정부가 국영 석유 산업을 외국, 특히 미국 기업에 우선 개방할 때까지 압박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식민지 거부'를 외치던 로드리게스 권한대행이 주권을 유지한 채 어느 수준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가 트럼프의 경고가 현실이 될지 협상으로 전환될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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