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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핵무기에 대한 혐오감, 핵전략의 교착상태 그리고 MX 미사일을 막는 의회의 정치로 인해서 매파들은 미국의 ICBM들이 취약하다고 믿었다. 과학적인 차원에서 전략방어계획 아이디어의 아버지는 핵물리학자인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였다. 텔러가 엑스레이 레이저를 사용하는 우주에 기지를 둔 방어의 아이디어를 1982년 9월에 대통령에게 던지자 레이건은 그것을 아주 논리적이라고 수용하였다. 레이건은 그것이 바로 자기가 희망해 온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건은 전략방어계획을 흥정용 칩이나 찌르기 작전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우산이라고 보았다. 전략적으로 미사일 방어는 미국의 ICBM들을 선제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레이건에게 핵동결운동에 대한 대답이었다. 도덕적으로 그것은 상호확정파괴(MAD)로부터 탈출구를 제공했다. 심리적으로 그것은 대단히 단순화하는 해결책이었다. 레이건은 좋은 소식으로 미국을 놀라게 하는 일을 기다릴 수 없었다.
1983년 3월 23일 레이건은 방어적 조치로 무서운 소련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하는 계획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NATO의 동맹국들이나 주요 의회 지도자들에게 사전에 전혀 알리지 않은 내용이었다. "악의 제국"이라는 그의 언급이 있는지 정확히 2주 후에 나온 '별들의 전쟁(the Star Wars)'이라고 즉시 알려진 연설은 소련의 지도층을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새 소련 지도자 유리 안드로포프(Yuri Andropov)는 그것을 미국이 전면적 핵전쟁을 계획하고 있고 이제 보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확인으로 받아들였다. 소련인들에게 레이건의 발표는 그들이 잘 할 수 없고 또 경쟁할 기술적 전문성도 없는 우주에서 군비경쟁을 알리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미사일 방어가 억제를 손상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리하여 일주일 후에 그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만일 기술이 개발된다면 그는 적과 그것을 공유할 것이다. 소련인들은 그의 첫 제안이 무시무시하다고 발견했다면 그들은 레이건의 추가적인 제안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새로 임명된 국무장관 조지 슐츠(George Shultz)는 정치적으로 온건한 인물이었다. 그가 부상하면서 레이건의 평화창조의 본능이 그의 매파적 공약을 우회하기 시작했다. 슐츠의 초강대국 관계를 해빙하려는 노력은 1983년 9월 1일 소련의 전투기가 소련의 영공으로 잘못 들어간 대한항공 여객기를 격추하여 269명에 달하는 탑승자 전원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여 갑자기 멎게 되었다. 사망자 중에는 미국의 하원의원 래리 맥도널드(Larry McDonald)와 60명의 미국 시민들이 포함되었다. 소련은 그 여객기의 격추를 터무니없이 부인하고 그 비행기가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레이건은 중대한 응징조치의 요구에 저항했지만 수일 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연설에서 그의 언어로 그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그 격추를 학살, 야만, 그리고 인류에 대한 범죄로 불렀다. 그는 소련이 민간 여객기를 의도적으로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소련은 레이건을 미친 자로 묘사하면서 그를 히틀러에 비유했다. 안드로포프는 미-소 관계의 어떤 개선도 레이건이 재임하는 동안에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국제적 쇼크가 급속히 이어졌다. 10월 23일 폭탄트럭이 베이루트의 막사에 있던 241명의 미 해병들을 죽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점령군 철수에 이어 다국적 평화유지 사명의 일부로 그곳에 전개되었다. 이틀 후에 레이건은 주민이 11만명인 카리브해의 작은 섬 그레나다(Grenada)의 침공을 승인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레이건의 방영된 연설은 그의 사고의 한계와 의사전달자로서 굉장한 재능을 보여 주었다. 난폭한 쿠데타에 의해 위험에 처한 거의 1000명에 달하는 미국 의대생을 구하기 위해 군대가 그레나다에 파병되었다. 그러나 레이건은 그것들을 소련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서 설명했다. 실제로 그 사건들은 서로 관련되지 않았다. 오직 그레나다만이 냉전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헤즈볼라(Hezbollah)와 이란이 레바논의 폭발에서 범인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레나다 침공의 진정한 중요성은 부활하는 미국 민족주의의 표현이었다는 점이다. 소련인들은 그레나다를 다가올 보다 큰 침공의 신호로 오독했다. 이 작은 전쟁 직후에 미국과 NATO는 에이블 아처(Able Archer)라는 작전명 아래 연례 군사훈련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소련은 미국이 군사훈련을 빌미로 핵공격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별들의 전쟁, 악의 제국 연설, 대한항공 격추, 그리고 그레나다로 인해 높아진 긴장의 배경에서 소련은 미국이 소련에 대한 기습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에이블 아처 훈련이 사고 없이 끝났지만 이것은 아마도 쿠바 미사일 이후 냉전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1984년 2월에 안드로포프가 죽고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그를 계승했다. 레이건이 체르넨코에게 미국은 아무런 공세적 의도가 없다고 편지를 썼지만 체르넨코는 레이건의 접근에 대꾸하지 않았다. 1984년 5월 소련은 1980년 미국의 보이콧에 대한 상응으로 다가오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게임에 불참한다고 발표했다.
1984년 1월 18일 레이건 대통령은 재선에 출마할 것을 발표했다. 그 발표는 레이건의 긍정적이고 애국주의적 재선 선거운동의 어조를 형성했다. 그는 공화당 내에서 도전자가 없었기에 선거의 시작부터 중도의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그의 약점은 73세라는 나이였다. 민주당 대통령 월터 몬데일(Walter Mondale) 후보와 토론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대통령으로서 활기찬 봉사를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레이건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나는 나이를 이 선거운동의 문제로 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나의 상대방의 젊음과 무경험을 이용하지 않으려 한다." 몬데일도 함께 웃었다. 그러나 그는 레이건의 그 답변이 그날 밤 선거운동의 진정한 종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이건은 49주에서 승리했으며 국민투표의 59%를 획득했다. 그 결과는 전통적 민주당원들이 공화당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는 것을 시사했다.
레이건은 그의 두 번째 취임사에서 미국의 예외주의를 장엄한 용어로 표현했다. 이 예외주의에서 모든 시민들에게 제공된 약속, 즉 지구상에서 인간의 마지막 최선의 희망을 부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마지막 그리고 가장 위대한 자유의 요새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레이건이 정책에는 관심이 없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문제에만 신경을 쓴다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연설이 실제로 레이건 리더십 스타일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레이건은 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하고, 의회에 압력을 가하고 그리고 자신의 보수주의 동맹세력들에게 그의 타협이 자신의 근본적인 공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공개 연설은 그가 행정부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신념과 제휴하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두 임기는 거의 상이한 대통령의 임기였다. 강경론자와 평화창조가 전 임기 동안 존재했지만 그러나 균형이 전자에서 후자로 결정적으로 이동했다. 핵동결이 소련의 선전이라고 비난했던 사람이 이제는 핵무기의 축소뿐만 아니라 모든 핵무기의 제거를 제안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리고 비서들에게 성경의 아마겟돈(Armageddon)이 멀지 않다고 염려했다. 1985년 3월 미카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소련의 새 지도자로 등장함으로써 핵평화에 대한 레이건의 희망이 다시 살아났다. 레이건이 평화창조로 전환하는 데에는 두 사람의 중대한 지지가 있었다. 한 사람은 친숙한 슐츠 국무장관이었다. 그는 소련체제의 취약성에 대한 레이건의 기이한 신념과 국비축소에 대한 그의 꿈을 공유했다. 또 한 사람은 숨겨진 인물로 작가 수잔느 매시(Suzanne Massie)였다. 매시는 러시아의 문화에 대한 레이건의 교사였고 소련 지도층에 대한 하나의 백 채널(a back channel)이었다. 그녀는 레이건에게 러시아의 속담을 가르쳤는데 그는 그것을 고르바초프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되풀이할 것이다. 그것은 '믿어라, 그러나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53세의 고르바초프는 교육을 잘 받았으며 서방세계를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그는 영어를 이해했으며 유머감각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권좌에 오른 첫 수개월 동안에 고르바초프는 유럽에서 중거리 미사일의 전개에 일방적 동결을 발표하고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즉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키신저, 닉슨 그리고 다른 현실주의적 사람들은 레이건에게 고르바초프가 전혀 변화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견해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처 수상은 처음으로 고르바초프를 만난 뒤 BBC 방송에서 "나는 고르바초프를 좋아한다, 우리는 함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처는 캠프 데이비드(Camp David)로 레이건을 방문했을 때 소련지도자에 대한 레이건의 낙관주의를 북돋우고 보다 상세한 평가를 전달했다. 그러면서도 대처 수상은 레이건에게 "적이 보다 매력적이면 더 위험하다"는 경고도 해주었다.
고르바초프의 처지도 여러 가지로 레이건의 처지와 비슷했다. 그도 역시 흔들리는 경제뿐만 아니라 소련사회에 팽배한 알코올 중독을 공격하면서 사회적 및 정치적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레이건처럼 그도 자기 밑의 관료기구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더 의존했다. 그는 상호확정파괴(MAD)에 대한 레이건의 혐오감을 공유했다. 같은 시기에 레이건은 소련의 외상 안드레이 그로미코에게 핵무기의 제거를 원한다고 말했고 고르바초프도 런던에서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다. 레이건과 슐츠가 그의 진화된 생각을 고무하는 반면에 고르바초프에게는 외상으로 그로미코를 대체하기 위해 선발한 에두아르드 세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가 있었다. 레이건이 새로운 소련지도자와 원하는 관계의 주된 장애물은 그가 갖고 있는 공상이었다. (계속) /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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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