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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목숨 걸고 힘겹게 밟은 한국땅… “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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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사각지대 놓인 '무국적 탈북민']
무국적 탈북민의 삶 재조명
화교 출신 이유로 '무국적자' 낙인
탈북민 보호도 난민 자격도 못얻어
은행계좌 개설·취업 등 꿈도 못꿔
법무부 "탈북민, 北출신 입증하라"
특수성 고려하지 않고 책임 떠넘겨
법 개정 의지 조차 없어 더 큰 문제
전문가 "통일부도 무관심으로 일관
무국적 탈북민 지위 개선 힘쏟아야"
국내 들어온 북한이탈주민 중 일부는 국적을 얻지 못한 채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고작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2년 체류 가능한 단기 비자뿐이다. 이 비자로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고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다. 이들도 다른 탈북민처럼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라 목숨을 걸고 이땅으로 건너왔지만 단지 화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법적 보호와 정착 지원을 받지 못한다. 아시아투데이는 14일 '북한이탈주민의 날' 2회째를 맞아 법과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인 '무국적 탈북민'의 삶을 조명한다. 아울러 국적심사 제도의 허점을 짚고 체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여러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재북 화교 2세 A(64)씨는 뇌혈전으로 마비가 된 몸을 이끌고 2013년 힘겹게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통일부는 그를 '탈북민'으로, 법무부는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 혈통이라는 이유였다. 그는 12년을 국적 없이 살아가고 있다.

재북 화교 3세 B(51)씨도 같은 처지다. 경제적 이유로 북한을 떠나 2010년 한국에 왔지만 탈북민 보호 대상도 난민 자격도 얻지 못했다.

이들은 북한을 떠나 이곳 한국에서 둥지를 틀었지만, 법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무국적 탈북민'이다. 화교 출신은 북한에선 중국인으로, 중국에서는 북한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이유로 중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나라도 이들이 중국 국적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법무부가 이들을 'STATELESS(무국적자)'로 낙인을 찍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화교 출신 탈북민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인 셈이다.


◇신원 보장 안 되는 '2년 체류' 신세…정부, 정착지원 예산 '0원'

무국적 탈북민이 처음 발을 내딛는 곳은 길어야 9개월 지낼 수 있는 외국인보호소다. 이곳에서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면 2년 임시 체류(F-1) 비자를 발급받아 살아야 한다. 이런 단기 비자도 2년에 한 번 갱신해야 할 정도로 불안정한 처지이지만, 이마저도 탈북단체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회장은 "혈혈단신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이 한국에 가족이 없어 F-1 비자를 발급받기 어렵다. 현재로선 정부가 나를 친척으로 간주해 줘 체류 자격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신원 증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없고 정부가 지원하는 주거지원 대상에도 제외된다. 취업도 제한돼 일용직을 전전한다.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니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이들 대부분은 탈북인권단체나 개인 후원자에 의지해 간신히 생계를 이어간다. A씨처럼 후원을 받아 단칸방에 사는 경우도 있지만 주거지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이도 있다. 이들은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다. 이들은 외국인과 같은 건강보험료가 적용돼 여느 탈북민보다 한 달에 5만원가량을 더 내는데, 생계가 어려운 이들에겐 경제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의 손길은 이들에게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투데이가 입수한 통일부의 '2014~2024년 세입·세출예산' 자료에 따르면 통일부는 탈북민의 초기 정착 등에 지원하기 위해 해마다 1000억원 안팎의 예산을 썼다.

하지만 이 기간 무국적 탈북민에게는 한 푼도 지원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언어, 문화 등 북한에서 넘어온 여느 탈북민과 다를 바 없지만, 법상 국적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정부 지원 정책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탈북민에 입증 책임 떠넘긴 법무부…"국적 심사 신청 포기"

무국적 탈북민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난민으로 인정받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법무부는 지난 2021년 화교 출신 탈북민 4명을 심사해 난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난민법에 따라 정치적 박해를 받은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이 때문에 현재로선 이들이 법무부 국적 판정을 통해 탈북민 인정을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법무부가 국적 판정에서 탈북민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심사 과정에서 탈북민에게 북한 출신을 입증할 서류를 요구한다. 헌법 3조에 따라 북한은 대한민국 영토로 인정돼 북한 출신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교 2·3세 탈북민은 현실적으로 북한 출신을 스스로 입증하기 어렵다. 이들은 북한에서 외국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북한 신분증(공민증)이나 북한 여권이 없다. 외국인증(화교증)이나 사진, 편지 등도 증빙 자료로 인정해 주지만 탈북 중 버리는 경우가 많다. 가족 DNA를 통해 혈통 관계를 증명하려 해도 한국에 건너온 가족이 없어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입증 증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무국적 탈북민이 국적 심사를 통과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얘기다. 이에 이들 대부분은 국적 판정 신청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법무부가 이런 사정을 알고도 입증 책임을 탈북민에게 떠넘기고 있는 점은 더 큰 문제다. 법무부는 이들이 제출한 서류 심사와 진위 여부를 확인할 뿐, 북한출신 입증에는 손을 떼고 있다. 이에 대해 법무부 관계자는 "사실을 입증해야 할 책임은 신청자의 몫"이라고 해명했다.

아시아투데이가 기획 취재에 들어가자, 현재 국적 심사를 맡고 있는 법무부 심의위원은 법무부의 소극적 심사 관행을 인정했다.

C위원은 "우리나라는 1962년 UN이 정한 '무국적자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한 곳이지만 법적 지위 개선에 소홀한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만간 열리는 심의에서 이 문제를 적극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장복희 전 법무부 난민위원도 "법무부가 적극적인 사실 조사와 입증 책임을 분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구제' 법 개정에 손 놓고 있는 법무부와 통일부

법무부와 통일부는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구제할 법 개정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 2009년 연구 용역을 진행해 국적 판정 세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결과를 이미 도출했다. 북한 국적 확인이 되지 않는 경우 이를 단순히 '국적 미보유(판정 불가)'로 판단하면 체류 관리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따라서 판정 결과를 세분화해 이를 체류관리 방안과 연계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이 같은 결론을 내리고도 지금까지 법 개정 논의 등 후속 조치에 나서지 않았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무국적 탈북민 문제에 대해) 외교나 대북 관계상 민감할 수 있어 답변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통일부도 관련 법 개정에 손을 놓기는 마찬가지다. 통일부는 올해 3월 재북 화교 2·3세와 비슷한 처지인 '제3국 출생자'를 탈북민으로 인정하자는 법 개정안을 사실상 거부했다. 탈북민 인정 문제는 신중히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무국적 탈북민의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탈북민으로 인정하고 지원하는 건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제3국 출생자 관련 법 개정에도 뒷짐을 지는 통일부가 극소수에 불과한 무국적 탈북민 지위 개선에 관심을 가질지 의문이 든다고 꼬집었다. 장복희 전 법무부 난민위원은 "탈북민의 지위 개선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통일부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해수 기자
남미경 기자
최인규 기자
최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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