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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정치적 자살과 이타적 희생, 지구인의 극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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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2. 28. 18:07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68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 스스로 몸을 태우는 사람들

2022년 2월 25일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25세의 티베트인 가수 체왕 노르부가 스스로 몸에 불을 놓아 활활 타올랐다. 같은 3월 27일에는 81세의 노인 타푼이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끊었다. 2009년부터 2020년대까지 거의 160명이 티베트인이 중국공산당의 통치에 맞서 티베트 독립을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극단적인 저항의 행렬을 이어갔다. 매번 티베트인의 분신 관련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면 국제 여론은 잠시 꿈틀대지만, 분신자살의 사례가 늘어날수록 정치적 충격파는 약해질 수밖에 없고, 더 큰 충격파를 일으키기 위해서 시위자들은 더 극단적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중국공산당의 대(對)티베트 정책엔 거의 아무런 변화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중국 중앙방송은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를 몇 해 연속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로 선정하는 기괴한(?)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다.

정치적 혹은 종교적 목적을 내건 분신자살은 일반인의 상상을 절하는 극단적 행동이지만, 결코 희귀한 현상은 아니다. 베트남 전쟁이 최고조로 치닫던 1963년 불교 승려 틱꽝득(1897-1963)이 가부좌 상태로 분신하는 장면은 전 세계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틱꽝득의 선례를 따라 30~40명의 베트남 승려와 인민이 같은 방식으로 저항하며 세상을 떠났다. 분신의 사례는 비단 불교 문화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1960년대 미국에선 퀘이커 교도나 가톨릭 신자 중에서도 정치적 분신자살을 택한 사례가 속출했다. 정치적 분신자살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의 의식(儀式)이다. 분신 행위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생물학적 생존 본능에 극적으로 반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의 자살일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가장 끔찍하면서도 선정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승려 틱꽝득의 분신
1963년 분신한 베트남 승려 틱꽝득
◇ 정치적 자살을 미화하는 극단성

숭고한 가치나 이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타적 자살은 지금도 여러 문화권에서 일상적으로 미화된다. 2020년 중국에서 제작된 영화 "팔백(八佰)"은 1937년 10월 26일부터 11월 1일까지 닷새간 상하이 쓰항(四行) 창고(倉庫)에서 벌어진 결사 항전을 극화한 블록버스터 흥행작이었다. 영화는 전편에 걸쳐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목숨 바쳐 싸우는 국민 혁명군 44사단 장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극적으로 미화한다. 클라이맥스는 중국 장병들이 건물 벽에 구멍을 뚫고서 스스로 몸에 폭약을 칭칭 감은 채로 몰려드는 일본군을 향해 장렬하게 투신하는 장면이다. 중국인 대다수는 침략자에 대항하여 조국을 지키려는 장병들의 희생에 크게 감동하고, 반일 감정을 품게 마련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학자 김선철의 2021년 연구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5년까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자살의 사례는 125건에 달하고, 그중 86건(68.8%)이 분신자살이었다. 정치적 자살에 대한 한국 학계나 언론계의 일반적 평가 역시 살신성인의 숭고한 저항이며 도덕적 정의와 자기희생의 표현으로 칭송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지구인들은 성장 배경과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사건들에 대해 서로 다른, 때론 극적으로 상충(相衝)되는 정서적 반응을 보인다. 중국인 대다수는 폭약을 몸에 감고 일본군 위로 추락하는 중국 장병의 희생에 크게 감동하지만, 일본인 대다수는 그러한 장면에 쉽게 공감할 수 없다. 외계인 미도의 관점에서 냉철하게 본다면, 도덕적 가치나 정치적 목적을 내건 이타적 자살은 모두가 지구인에게서 관찰되는 극단성일 뿐이다.

영화 '팔백'에서 폭약을 몸에 감고 뛰어내리는 장면
영화 "팔백"의 한 장면. 중국 장병들이 한 명씩 폭약을 몸에 감고 건물에서 뛰어내러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다.
◇ 사피엔스의 극단성, 문명 창달의 정신적 동력인가?

실제로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위에 살아가는 230만 개의 종(種, species) 중에서 유일하게 생물학적 평형을 해칠 정도까지 목적-의식적으로 집요하게 극단성을 추구하는 희한한 종이다. 여기서 극단성이란 동물적 본능에 거슬러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뿌리 깊은 심적 경향성과 또 그러한 행위 양식을 의미한다. 또 생물학적 평형이란 유기체의 단위에선 생존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몸의 항상성이, 종적 단위에선 생태적 균형이 자율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생존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신체적 항상성을 유지한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 중에서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명예, 완벽, 순결, 자유, 평등, 구원, 국가, 민족 등등의 상징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생존 본능에 거슬러 신체적 항상성을 파괴할 수 있다.

물론 곤충도 군체에 위협이 닥치면 자발적으로 이타적 자살을 한다는 생물학 보고서가 있지만, 곤충의 자살은 이미 DNA 정보체계 속에 유전적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본능적 반응일 뿐이다. 군체의 존속을 위한 생물학적 최적화 과정의 결과라 설명될 수 있다. 반면 인간의 정치적 자살은 개인의 자발적 선택에 따라 가치, 이념, 신념의 근거 위에서 행해지는 목적-의식적 행위라는 점에서 곤충의 자살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흡사 벌집과 인조 건축물의 차이와도 같다. 벌의 군체는 육각형의 정교한 벌집을 만들지만, 그 벌집은 진화 과정에서 DNA에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른 본능의 구현체일 뿐이다. 반면 인공의 건축물은 본능에 입력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창의력을 발휘해 설계하고 다양한 자재를 사용해서 제작한 창작물이다.

그 점에서 곤충의 자살은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 본능적 행위일 뿐이지만, 인간의 정치적 자살은 생존 본능에 정면으로 반하는 인간적 극단성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극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은 전체 인구에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인류 사회 거의 모든 문화권이 더 높은 가치 실현을 위한 개인의 자발적 헌신을 인간성 실현의 최고 표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행동을 살신성인(殺身成仁), 멸사봉공(滅私奉公), 존천리(存天理)·거인욕(去人欲)의 숭고한 실천으로 미화하고 칭송하는 공동체는 암암리에 개인의 극단적 자기희생을 강요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 본능에 반하는 자기희생은 오직 호모 사피엔스에게서만 관찰되는 극단성이다.

일상어에서 "극단성"은 흔히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실은 수월성(excellence), 완벽성(perfection), 절대성(absoluteness), 궁극성(ultimacy), 탁월성(preeminence) 등의 긍정적 개념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가 않다. 극단성이란 부정적 단어를 수월성, 완벽성 등의 용어로 대체하면, 인간이 얼마나 경쟁적으로 한계를 넘고, 극한까지 나아가는 성향을 보이는지 더 쉽게 알 수 있다. 인류 문명사 모든 방면에서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 더 쉽게, 더 아름답게, 더 숭고하게 한계의 한계를 넘어 극단의 극단까지 끊임없이 나아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문명 발달의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함에 절망하며 머릿속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돌이켜 보면, 세계 종교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편재(遍在), 지극(至極), 지고(至高), 지선(至善), 지존(至尊), 순수(purity), 순선(純善) 등의 개념어들 역시 불완전한 인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완벽한 존재의 속성을 이른다는 점에서 극단적 사유의 산물이다.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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