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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학의 내가 스며든 박물관] 트라팔가의 영혼이 되살린 숱한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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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2. 28. 18:15

<18> 캐나다 온타리오 '콜링우드 박물관'
966년 개관한 ‘콜링우드 박물관’
옛 기차역을 복원하여 1966년 개관한 '콜링우드 박물관'.
오대호 조지안 베이의 남쪽 끝, 물길이 잔잔해지는 곳에 콜링우드(Collingwood)가 있다. 지도 위에서는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한 이 도시,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예상과는 전혀 다른 깊이를 드러낸다. 이 도시의 시간은 단순히 오랜 것이 아니라, 치열했고, 대담했으며, 때로는 가슴 아픈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 모든 기억이 고요히 숨쉬는 곳, 바로 '콜링우드 박물관'이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1873년에 세워진 콜링우드 기차역의 원형을 복원하여, 1966년 5월 20일 개관한 것으로, 철도와 항만이 만나던 시대의 중심에 서 있던 장소다. 불에 타고, 축소되어 다시 지어지고, 결국 기능을 잃은 뒤에도 이 건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을 보존하고, 되살리는 공간으로 남았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박물관 건물은 원형을 충실히 되살린 재건축물이지만, 그 안에 깃든 시간은 단절된 적이 없다.

콜링우드라는 도시 이름부터가 이미 하나의 이야기다. 한때 이곳은 'Hen and Chickens Harbour(암탉과 병아리 항구)'로 불리던 삼나무 습지였다. 철도 종착지가 될 예정이었던 이 땅에 보다 품위 있는 이름이 필요해졌을 때, 측량사 중 한 사람이 '콜링우드'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승리를 완성한 인물인 커스버트 콜링우드(1748~1810) 제독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작은 항구 마을은 그렇게 대서양의 전쟁사와 연결되었다. 이 이름은 바다와 세계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도시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이 도시가 무엇으로 살아왔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조선(造船)'. 1883년부터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콜링우드 조선소는 이 마을의 가장 큰 고용주이자 정체성이었다. '거리 끝에 배가 있는 마을'이라는 별명처럼, 선체의 실루엣은 언제나 일상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의 얼굴, 진수식을 앞두고 항구에 모인 군중들. 전시된 수많은 사진과 유물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데, 한 척의 배는 단지 강철과 리벳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노동과 기대, 그리고 자부심으로 완성되었음을 알게 한다. 콜링우드의 조선산업이 특별한 이유는 이곳이 단순히 배를 만든 장소가 아니라,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을 발명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항구의 수심이 얕다는 조건은 대형 선박 건조에 치명적일 수 있었지만, 콜링우드는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측면 진수(side launch)' 방식이다. 배를 정면이 아닌 옆으로 물에 미끄러뜨리는 이 방식은, 정밀한 계산과 숙련된 노동, 그리고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박물관에 남아 있는 기록사진과 영상은 그 긴장감을 생생하게 전한다. 진수식 날이면 상점은 일찍 문을 닫고,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으며, 수천 명의 시민들이 울타리와 옥상, 도로 위에서 숨을 죽이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 밧줄이 도끼로 끊어지고, 거대한 강철 선박이 단 몇 초 만에 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그 짧은 시간은 콜링우드 사람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았다. '배의 탄생이 아니라, 한 도시의 삶이 물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라는 설명이 가슴에 와닿는다.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길을 만들어낸 그 역사는 지금도 이 도시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콜링우드 조선소는 평화의 시기뿐 아니라 전쟁의 시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곳에서는 캐나다 해군과 상선대를 위한 군함과 화물선이 건조되었다. 특히 1940년, 이 항구에서 진수된 캐나다 해군함정 콜링우드호(HMCS Collingwood)는 캐나다 최초의 초계함 중 하나로, 대서양 전투의 험난한 수송로를 지켰다. 박물관에 전시된 황동 종과 명판, 유니폼과 기념품들은 이 작은 도시가 세계사의 격랑 속에서 맡았던 역할을 조용히 증언한다. 산업이 곧 저항이었고, 노동이 곧 전선이었던 시대의 증언인 셈이다. 그러나 콜링우드 박물관은 영광만을 말하지 않는다. 1986년, 조선소가 문을 닫았을 때 이 도시는 백 년 넘게 이어진 산업의 심장이 멈추고, 수많은 삶의 리듬이 바뀌는 큰 상실을 경험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자칫 사소해 보이는 물건들 속에는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왔는가"라며 되묻는 기억이 담겨 있다.

기억은 박물관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박물관 앞 잔디 위에 서 있는 'The Last Post' 추모 동상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콜링우드 시민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1922년에 이 기념비를 세웠다. '마지막 경례(The Last Post)'는 원래 하루의 순찰이 끝났음을 알리는 군악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임무가 끝났음을 알리는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이 모든 역사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이름 없이 일하고, 싸우고, 떠났던 사람들. 이 도시는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박물관을 세웠다. 전쟁을 기념하는 것은 희생할 가치가 있었던 삶과 선택을 기억하는 일이라는 속 깊은 의미 아니겠는가. 말 없이 그 사실을 전하는 기념비 앞에서 그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마지막 경례'를 붙이고 싶어질 것이다.

콜링우드 박물관에는 대도시의 박물관이 쉽게 가질 수 없는 밀도가 있다. 산업의 흥망, 기술의 도전, 전쟁과 희생, 그리고 조선소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공동체의 기억까지, 이 모든 것이 한 도시의 크기에 맞는 무게감으로 담겨 있다. 이 박물관에 스며드는 것은 작은 도시가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경험에 다름아니다. 조지안 베이의 바람을 맞으며 박물관을 나서는 순간, 콜링우드는 더 이상 조용한 관광지가 아니다. 뜻밖의 역사와 놀라운 이야기를 간직한 장소로,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도시가 된다. /前 대구교육박물관장

/김정학 (前 대구교육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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