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주년 OCI미술관, 잊힌 컬렉터 윤상 부활시킨 전시 선보여 천경자·유영국 등 작품 걸려 '사진 거장' 임응식이 촬영한 화가들 '눈길'
서양화가 임직순이 그린 윤상 모습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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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임직순이 그린 윤상 모습. /사진=전혜원 기자
한국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던 1956년 비 내리던 여름, 윤상(尹相·1919∼1960)이라는 미술품 수집가가 연 전시가 문화계에 훈풍을 몰고 왔다. 당시 한국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명동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윤상 수집 현대화가 작품전'은 개인이 수집한 작품 전시치고는 대규모 전시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동·서양 원로, 중진, 신진 화가 49인의 작품 64점이 어우러진 전시에 방문한 화가들은 서화첩에 덥수룩한 수염을 강조한 윤상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고, 다양한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축하 기록을 남겼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 OCI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전에서는 일종의 방명록이라 할 수 있는 이 서화첩을 볼 수 있다. 2010년 케이옥션 경매에서 이 서화첩을 입수한 OCI미술관은 그간 보존 처리, 조사 연구 등을 거쳐 15년 만에 공개했다.
이상범 모운과 유영국의 도시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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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개관 15주년을 맞은 OCI미술관이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전을 열고 있다. 사진은 이상범의 '모운'(왼쪽)과 유영국의 '도시'가 나란히 걸려 있는 모습. /사진=전혜원 기자
올해로 개관 15주년을 맞은 OCI미술관이 선보이고 있는 이번 전시는 잊힌 컬렉터인 윤상을 부활시킨 자리다. 윤상은 평양 출신의 개인 소장가로 과수원을 운영했던 인물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41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전시도 한번밖에 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연 전시는 한국전쟁 이후 우리 미술계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줬으며, 현대미술관의 필요성도 제기될 만큼 그 의미가 컸다. 특히 1950년대는 한국 화단이 변화와 갈등을 겪던 시기였지만 세대와 계파를 따지지 않고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한 윤상의 행적은 오늘날 큰 시사점을 준다.
전시를 기획한 유제욱 학예사는 "당시는 현대 미술계의 주도권을 둘러싼 홍대파와 서울대파의 분규가 일어났던 시기였지만 윤상 전시는 그와 상반된 화합의 양상을 보였다"면서 "서양화와 동양화를 함께 전시한 것도 당시로선 굉장히 파격적"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산'의 화가로 알려진 유영국의 1955년작 '도시'(都市)가 윤상 전시 이후 처음 공개돼 눈길을 끈다. 유 학예사는 "유영국은 주로 자연 소재인 '산'을 그린 추상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도시'를 통해 인공적인 풍경도 그렸음을 알 수 있다"면서 "유영국의 '도시'는 이상범의 수묵화 '모운'과 나란히 전시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1956년 당시 전시 분위기를 재현했다"고 말했다.
천경자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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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서화첩 속 천경자 그림. /사진=전혜원 기자
전시장에는 화가 천경자가 "작품이 많이 팔리지 않아 퍽 섭섭합니다"란 글을 써 넣은 그림을 비롯해 김환기, 이응노, 김기창, 변관식, 김은호, 고희동 등 한국 근현대 거장들의 작품이 걸렸다.
또한 사진계 거장 임응식이 촬영한 예술가들의 초상 사진이 다수 걸려 재미를 더한다. 임응식은 당시 윤상 전시 출품 작가 49명 중 38명의 초상 사진을 찍었다. 전시에서는 임응식이 찍은 사진과 함께 방명록에 기록을 남긴 인물들의 사진까지 57점을 볼 수 있다.
15분 남짓 이어지는 김시헌의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도 재밌는 영상작품이다. 사진을 바탕으로 AI를 이용해 윤상을 비롯한 당시 인물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윤상은 흑백 느와르 영화의 상남자처럼 파이프 담배를 물고 등장한다.
김시헌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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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 서화첩 너머로 김시헌 작가의 영상작품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이 상영 중이다. /사진=전혜원 기자
OCI미술관은 OCI 창업자인 송암 이회림(1917~2007)이 만든 송암문화재단 산하에 있다.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불리는 송암은 남다른 예술 애호가였다.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 화백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인천에 송암미술관을 지어 2005년 인천시에 기증했다. OCI미술관은 할아버지의 남다른 미술 사랑을 물려받은 미술사학자 출신의 이지현 관장이 이끌고 있다. 이 관장은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선정 작가 중 한 명인 양정욱과 홍익대 회화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홍정욱 등도 이곳을 거쳐 갔다.
1950년대 당시로선 획기적인 미술품 컬렉터였던 윤상을 되살려낸 이번 전시는 송암의 남다른 예술 사랑을 바탕으로 건립된 OCI미술관에서 열려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 전시는 3월 2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