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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전 '못해도 하루에 영화 5편은 보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 같은 결심이 헛된 꿈이었다는 걸 부산 도착 다음날 바로 깨달았다. 간밤에 들이킨 술로 속이 좋지 않아 영화 상영 도중 화장실 들락거리기 바빴다. 또 밤을 새우다시피 한 탓에 극장 의자를 침대삼아 마음껏 숙면을 취하던 중, 얼마나 코를 골아댔는지 뒷좌석 커플 관객이 발로 의자 뒤를 세게 걷어차 일어난 적도 있다.
그럼에도 1회때 과도한 음주로 인한 후유증을 이겨내고 본 '크래쉬'와 '공각기동대' 등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깊이 새겨져있다.
자동차 충돌 사고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이상성욕자들을 통해 기계와 인간의 성적 결합을 예견한 '크래쉬'의 결말부에서 남녀 주인공이 사고를 당하고도 공허한 눈빛과 나른한 손짓으로 서로를 탐하는 장면 그리고 사이버 펑크를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도입부의 주제 음악은 BIFF에서만 가능했던 시청각적 체험으로 영원히 남을 듯싶다.
이후 영화 담당 기자로 신분이 바뀌고도 BIFF 기간중 부산에서의 일과는 여전했다. 업계 사람들 만나 취재한다는 핑계로 지난 6월 철거된 해운대 포장마차촌과 뒷골목 술집들을 밤새도록 누비다 바다를 가르며 떠오르는 해를 보기 일쑤였고, 낮에는 기사 쓰고 자느라 극장에서의 초청작 관람은 뒷전인 출장이 매해 가을 반복됐다. 부산행 KTX 타는 게 지겨워졌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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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자주는 아니지만 몇 차례 경험한 바로 특히 칸은 유명 영화인들과 수출입 업자 등 전 세계 영화산업 종사자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잔치'다. 주요 초청작 상영 등 대부분의 공식 행사는 축제의 진짜 주인공인 일반 관객들이 접근하기조차 어렵고, BIFF의 '오픈 토크'나 '액터스 하우스'처럼 배우 혹은 감독과 조금 멀리서라도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억세게 운이 좋으면 크로와제 거리나 특급 호텔 입구에서 할리우드 톱스타들을 만날 수 있지만, 그마저도 경호원들의 제지로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는 수준에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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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지난 2일 막을 올린 제29회 BIFF는 개선의 움직임이 비교적 뚜렷해 보인다. 예전과 달리, 넷플릭스 오리지널에 웰메이드 상업영화인 '전,란'을 개막작으로 선정한 것부터 그렇다. 예산 부족으로 해외 유명 게스트들의 부산 나들이가 줄어든 점은 다소 아쉽지만, 많은 국내 영화인들이 힘을 합쳐 그들의 빈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같아 보기 좋다.
늘 그랬듯 '위기는 곧 기회'다. BIFF가 대중과의 접점을 다시 늘려, 올해를 반전의 출발점으로 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