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강성학 칼럼] 에이브러햄 링컨: 고결한 성품의 천재적 리더십(하)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biz.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822010011945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8. 22. 17:30

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링컨의 탁월한 리더십은 그의 전임자뿐만 아니라 그의 후임자들과도 역시 크게 구별되었다. 링컨 대통령의 서거로 갑자기 대통령직을 계승한 제17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은 남북전쟁 후 미국의 국가적 상처를 봉합해야 할 막중한 과제를 부여받았으나 이를 해결할 기회를 상실했다.

링컨의 과업을 완수할 것으로 모든 기대를 모았던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도 크게 실망스러웠다. 그는 링컨이 지향했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링컨에 의해 선택되었던 군사령관으로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었으며 정의롭고 항구적인 미국 내 평화를 이룰 수 있는 폭넓은 아량과 이해력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남북전쟁 후 최초의 대통령 선거에서 백악관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직은 그랜트와 미국에게 하나의 비극적 스토리였다. 전시의 훌륭한 군 사령관의 능력과 평화 시의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능력은 별개의 것이었다.

링컨이 승리한 미국의 남북전쟁은 범세계사적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남북전쟁은 최초의 총력전(the total war), 혹은 최초의 현대전이었다. 남북전쟁은 그 수행방법에서 미국독립전쟁이나 나폴레옹 전쟁보다는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에 훨씬 더 가까웠다.

단순히 평화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제한전쟁이 아니라 적의 섬멸을 전투의 목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받을 때까지 수행하는 현대의 총력전은 그 이전의 전쟁과는 달랐다. 이것은 무제한적 목적을 추구하고 무제한적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예상할 수 없는 결과가 따른다는 특징이 있다.
남북전쟁은 '전부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전쟁이었다. 남부는 절대적 독립을 원했고, 북부는 절대적 통일을 원했다. 일단 피를 본 이상 양측이 서로 만나 타협할 중간지점이 없었다. 총력전이 된 것이다. 총력전에서는 적의 군대만이 공격의 유일한 목표물이 아니다. 진실로 파괴해야 할 것은 적의 전쟁수행능력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수단에 제한이 없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문명화된 전쟁의 옛 규칙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둘째로, 링컨의 민주주의는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전 세계에 민주주의의 상징과 횃불이 되었다. 근대 민주주의는 영국이 원산지였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성문헌법이 없는 일종의 정치적 삶의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명백한 성문헌법에 입각한 공화정으로 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을 택했다.

그러나 그 성문헌법은 미완성에 머물렀다. 이제 남북전쟁에서 링컨의 승리가 가져온 수정헌법(제14-15조)을 통해 미국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의 헌법질서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특히 남북전쟁의 와중인 1863년 게티즈버그 장례식 연설에서 링컨이 제시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즉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새로운 정의는 기원전 아테네의 민주지도자 페리클레스의 '소수가 아니라 다수에 의한 지배'라는 정의에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들을 사실상 압도해 버렸다. 그리고 성문헌법에 의한 미국식의 민주주의가 불문헌법의 영국식 민주주의를 사실상 대체해 버렸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전 지구인들이 영국식 점진적 개선이 아니라 '이론적 계획'에 의해서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모델이 되었다.

셋째로, 1871년 미국과는 무관하게 유럽에서 프러시아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탁월한 리더십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소위 제2의 독일제국이 수립되었다. 그 결과 유럽은 신식민주주의 시대(the Age of New Imperialism)로 접어들었다. 유럽에서 1871~1914년 사이 40여 년간의 긴 평화는 동시에 유럽 밖에서 해외 식민지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미국이 남북전쟁의 결과로 발칸화 되었더라면 미국은 유럽제국들의 치열한 팽창주의적 쟁탈전의 대상으로 전락해 여러 주(국가)들이 주권적 실체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메리카 대륙도 19세기 후반 동일한 수준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아시아나 아프리카가 경험했던 제국주의 경쟁의 객체로서의 역사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남유럽의 발칸지역에 이어 미국도 유럽제국들의 '화약고'의 지위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넷째로, 남북전쟁으로 미국의 연방정부가 존속됨으로써 일종의 '대륙의 제국'으로서 미국의 지리적 조건은 국제사회에서 아주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서반구에서 미국의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지위는 미국으로 하여금 서반구를 지배하는 패권국이 될 수 있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반구 즉, 유라시아 대륙에서 힘의 균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유와 자원을 갖게 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일찍이 니콜라스 스파이크먼(Nicholas Spykman)이 내다보았던 것처럼, 20세기의 본질적인 지정학적 투쟁에서 양차 세계대전 및 뒤따른 냉전시대를 통해 자국에 유리한 세력균형을 형성해 갈 수 있었다. 서반구와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은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이며 특히 중국의 부상과 무제한적 해군력 증강으로 인해 요동치는 동아시아는 이러한 지정학적 대결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19세기 중엽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에 미국은 유럽의 강대국들로부터 강대국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 인정은 20세기 양차대전 이후부터다. 미국의 국가적 위상은 21세기에도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역사가 곧 세계사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오늘날 현대 미국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정치적 및 군사적 천재였던 링컨이 지도자로서 보여준 덕목은 아주 다양하다. 그는 정치가로서 무엇보다도 확고한 정책비전의 소유자였다. 동시에 놀라운 수사학으로 그것을 표현하여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그의 탁월한 설득력의 비결이었다.

그는 '분열된 집은 바로 설 수 없다'면서 미합중국의 통일을 최우선시했으며 노예제도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었기에 그의 정치적 행동에서는 항상 타이밍을 중요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시대 누구보다도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애국주의는 특히 미합중국의 통일에 대한 그의 신념은 완고하고 비타협적이었다. 그리고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던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비견할 링컨의 군사전략적 안목은 장군들의 판단을 앞섰다.

또한 무엇보다도, 자신의 직무에 대한 철두철미한 의무감에서 그는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 겸 철학자였던 키케로의 후예라 해도 좋을 것이다. 링컨의 명언으로 알려진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경구의 원전도 사실은 키케로였다. 키케로는 정치지도자가 헌법과 법률에 대한 의무는 물론이고 도덕적 의무에 의해서 제약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링컨의 다양한 덕목 가운데 그에게 가장 고유한 것은 그의 장엄함, 즉 타인에 대한 아량이었다. 그에게는 타인들이 느끼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또 그들의 동기와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두는 재능인 공감능력(empathy)이 탁월했다. 넓은 의미에서 그의 공감능력은 그로 하여금 자기 동포들의 슬픔과 희망을 흡수하고, 그들의 변하는 기분을 감지해서 올바른 때에, 올바른 말과 행동으로 그들의 의견을 형성하고 또 만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링컨은 놀라운 유머감각의 소유자로 어려운 순간에 자신과 동료들의 긴장을 먼저 풀어주었다. 그는 자신의 전략적 실수를 그랜트(Grant) 장군에게 서신으로 인정했다. 한 하원의원이 링컨에게 에드윈 스탠턴(Edwin Stanton) 전쟁장관이 링컨 대통령을 완전한 바보로 불렀다고 하자 링컨은 "만일 그가 나를 바보라고 불렀다면 나는 바보임에 틀림없다"고 대꾸했다. 이처럼 링컨은 무엇보다도 도량이 아주 넓은 장엄한 인물이었다.

당시 흑인들에게는 제2의 모세(Moses)로 추앙을 받았던 링컨을 마키아벨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링컨 대통령은 "무장한 예언자"였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작은 예수"라고 불렀던 이 탁월한 전쟁지도자는 4년간에 걸친 치열한 전쟁을 치른 뒤 1865년 3월 4일 그의 두 번째 취임사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고, 모두에게 자비심으로 우리가 시작한 일을 완수하기 위해 우리 모두 매진합시다!"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남북전쟁의 승전의 문턱에서 1865년 4월 14일 밤 포드극장에서 연극배우 출신 암살자 존 윌키스 부스(John Wilkes Booth)의 총탄을 맞고 다음 날 15일 오전 7시 직후에 링컨은 서거했다.

당시 임종의 현장에 있었던 에드윈 스탠턴 전쟁장관은 예지력 있게 "이제 그는 시대를 초월하는 인물이 되었다(Now, he belongs to the ages)"고 말했다. 링컨이 시골 무명의 변호사 시절인 1850년대 스탠턴과 어떤 법률사건의 파트너일 때 그는 링컨을 "긴 팔을 가진 원숭이"라 부르면서 그를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해서 링컨에게 큰 굴욕을 주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을 그렇게 무시했던 스탠턴의 바로 그 특성, 즉 그의 집요함, 그의 퉁명스러움, 그리고 성공을 향한 결의가 전쟁장관에게 필요한 바로 그런 특성이라고 인정하고 그를 전쟁장관에 임명했다. 남북전쟁 수행과정에서 스탠턴 전쟁장관은 링컨에게 충성을 다했고 링컨의 안목이 정확했음을 입증해줬다.

링컨이 서거했을 때 링컨과 동시대의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이 "링컨은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찬양했다. 당시 링컨에 대해 빈번하고 신랄한 비판자였던 영국의 유명한 잡지인 <펀치>(Punch)의 편집자요 통렬한 링컨의 비평가였던 톰 테일러(Tom Taylor)는 링컨이 서거한 지 3주 만에 "그는 나를 비웃기 위해 살다 갔다. 링컨은 인간들의 진실로 타고난 왕이었다. 찬양할 것은 많아도 용서할 것은 별로 없다"고 자신의 헌정시에서 읊었다.

1959년 2월 9일 링컨의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서 기조연설자로 초빙된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당시 서베를린 시장은 1500여 명의 청중들에게 "나의 친구 여러분! 링컨은 당신들에게만 속하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후에 서독 수상이 된 빌리 브란트는 독일을 위한 영감으로, 그리고 물론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의 상징으로 링컨을 계속 언급했었다.

사후 링컨의 얼굴은 국립공원 러시모어 바위산에 새겨져 이제는 그 자신이 스스로 미국인들의 '큰 바위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링컨의 고결한 이미지 덕택에 미국은 위대한 "링컨의 나라(the Country of Lincoln)"가 되었다. 역사는 기술하지만 기억은 명령한다. 애국주의는 도덕적 미덕일 뿐만 아니라 지성적 미덕이다. 온당한 애국주의는 단순히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에서 링컨의 위대성에 대한 교육이 멈추는 날, 그리하여 링컨이 더 이상 미국인들의 '집단적 기억'의 대상이 되지 않는 날엔 '링컨의 나라'라는 미국의 국가적 위대성도 종언을 고할 것이다. (끝)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