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두둥실 떠 있는 푸른빛의 밤하늘. 그 아래 산길에는 홀로 걷는 사람이 조그맣게 보인다. 단순한 몇 개의 선으로 표현됐지만 밤의 감흥에 세련미가 더해진 이 작품은 한국화 거장 김선두의 '밤길'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위치한 학고재 갤러리에서 김선두 개인전 '푸르른 날'이 열리고 있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학고재에서 만난 작가는 이 작품에 관해 "달을 통해 삶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향이 전라남도 장흥인데 전기가 하나도 없는 시골이었어요. 밤에 다니다 보면 달이 떠 있는 날은 달이 저를 따라옵니다. 어떨 때는 산길이 무지하게 무서운데 달이 떠 있는 날은 그나마 걸어갈 만했어요. 달을 통해 삶의 희망, 위안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김선두, 아름다운 시절-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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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두의 '아름다운 시절-김수영'. /학고재
전시장 입구 쪽에는 시인 김수영의 젊은 시절을 담은 초상화가 걸렸다. 작품 상단에는 시인의 초상화가, 하단에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의 알파벳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 김수영의 '이 한국문학사'가 적혀 있으며, 글씨는 덧써져 마치 연기처럼 보인다. 김선두의 '아름다운 시절' 연작 중 하나로, 작가는 이 시리즈를 통해 유한한 시간 속 찬란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번 전시 주제는 '삶의 절정'이다. 작가는 꽃이 피는 찰나, 폭죽이 터지는 순간, 성취의 절정을 포착함과 동시에 그 이후의 감정과 모습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전시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은 폭죽이 터지는 순간의 화려함을 할미꽃, 찔레꽃, 등꽃 등으로 형상화한 '싱그러운 폭죽'이다. 세로 2m, 가로 8m에 달하는 대작으로 갤러리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작품이다.
김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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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 '싱그러운 폭죽' 앞에 선 김선두 작가. /사진=전혜원 기자
"2003년에 이청준 선생님께 세배 인사드리러 갔다가 그곳에 있는 할미꽃을 봤어요. 할미꽃이라고 하면 뭔가 슬프고 힘이 없는 꽃 같았는데, 굉장한 에너지를 느꼈어요. 마치 대지에서 쏘아올린 폭죽 같았습니다. '싱그러운 폭죽'은 거기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에요. 이 그림을 통해 절정 뒤의 허무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김선두는 장지에 분채를 여러 번 쌓아올리는 기법을 사용해 색을 우려낸다. 장지는 촘촘하고 두껍기 때문에 수십 차례 채색해도 색을 포용할 수 있다. 물감을 머금은 장지에는 색이 투명하고 짙게 발색된다. 채색을 얹어 지우고 더하는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해 작품에 깊이감을 더한다.
자연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김선두는 새와 들풀 등 자연의 대상을 그려왔다. 그의 작업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자연의 이치와 삶, 예술에 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특히 현대적인 감각으로 한국화를 재해석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김선두, 낮별-장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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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두의 '낮별-장닭'. /학고재
"어떻게 하면 한국화가 현대화로서 기능할까 항상 고민하며 새로운 실험을 많이 해왔습니다. 저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낡은 방식으로 새롭게 이야기하기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만의 미감을 새로운 미디어로 풀어가는 것이지요. 이번 전시에는 첫 번째 방식이 주가 된 작품들을 선보였네요."
중앙대 한국화학과 명예교수인 작가는 김훈 '남한산성' 표지와 임권택 감독 영화 '취화선'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장승업 그림 대역을 맡았다. 학고재에서 7번째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총 36점을 소개한다. 8월 1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