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공공기관장을 59명이나 무더기로 임명했다. 새 대통령이 국정을 원활하게 수행하도록 "임기말 인사는 다음 정부에 넘긴다"는 훌륭한 불문율이 이미 있었지만 문 전 대통령은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임기말 '알박기' 인사를 단행했다. 혹시 문 전 대통령이 이런 임명의 문제점을 지금이라도 깊이 깨달았다면, 이들의 자진사퇴를 권해주기 바란다.
이런 알박기 인사의 결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치를 앞세운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백지화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핵심정책 설계자들과 좌파 성향 인사들이 새 정부에서도 여전히 공공기관장 자리를 차지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이런 알박기 인사는 국민의 선택을 깡그리 무시하는 오만한 행동일 뿐 아니라 일종의 '국정방해'로 볼 수도 있다.
한상혁 방통위원장, 전현희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이 사퇴를 거부한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한상혁 방통위원장의 경우, TV조선 재승인과 관련해 점수조작 관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는데 정부는 최근 한 방통위원장의 면직절차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과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KOBACO) 사장의 경우에도 물러나지 않고 버티고 있어 현 정부의 국정에 부담을 주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탈핵운동가 김제남 전 청와대 수석의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 취임, 과거 "북한에서는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 소련군의 후원에 힘입어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반혁명 정책에 의해 좌절됐다"는 글로 역사관 논쟁을 일으킨 정해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경사연) 이사장 임명, 소득주도성장 정책 설계자 홍장표 전 경제수석의 KDI 원장 임명 등의 사례가 있다.
이와 관련해 한덕수 총리는 취임 1개월 기자단 만찬에서 정해구 경사연 이사장과 홍장표 KDI 원장을 지목해 "우리(윤석열 정부)하고 너무 안 맞다"고 직격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 이후 홍장표 KDI 원장은 자진사퇴했지만, 정해구 경사연 이사장과 김제남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은 여전히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우파 윤석열 정부의 '자유민주주의' 기치와 배치되는 인물이 세금으로 국정을 지원하는 국책연구기관들을 총괄하는 자리를 계속 맡고, 탈핵운동가가 탈원전 백지화를 내건 새 정부에서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직에 머물고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괴상한 일이 G7 회의에 초대받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니 답답할 노릇이다.
◇ 국정 방해하고 혈세 축낼 생각 없다면 '자진사퇴'가 국민에 대한 도리
지난해 말 기준으로 350개 전체 공공기관 기관장과 임원 3080명 가운데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인사는 무려 2655명으로 전체의 86%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이 "남은 임기를 끝까지 지키라"는 내부지침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그 수는 별로 줄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1억 5000만원이 넘는 연봉에 기사 딸린 승용차를 누리면서도 국민이 대선에서 선택한 새 정부의 비전과는 정반대되는 정책을 구상하는 것조차 가능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만 봐서는 정권이 교체됐다고 볼 수 없을 정도다.
◇ 한전사장의 자진사퇴, 다른 공공기관장들의 사퇴로 이어지길
우리 선조들은 공직자로 진출했더라도 새로운 정권이 자신의 뜻과 다를 때는 물러나라고 가르쳤다. 이는 시대를 불문하고 자존심을 지닌 공직자가 지켜야 할 바람직한 자세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적폐라고 몰던 세력이 집권했는데도 그대로 공직에 머물면서 그저 국민의 세금만 축낸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세금의 부담자이면서 새로운 정부를 선택한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다.
정승일 한전사장이 한전적자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한전사장의 자진사퇴를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 임기말 임명된 공공기관장들이 부끄러움을 절감하고 스스로 물러날 것을 촉구한다.
◇ 부처장관들, 소신과 의지를 갖고 산하 공공기관 정상화에 나서라
이런 버티기 현상이 계속되는 데는 이를 시정해야 할 책임이 있는 각 부처 장관들이 직권남용을 우려해 몸을 움츠리고 이를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1일 국무회의에서 "탈원전, 이념적 환경정책에 매몰돼 새 국정기조를 맞추지 않으면 과감한 인사 조치를 하라"고 강조했다. 이런 과감한 인사 조치를 지시한 것은 이런 현상의 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각 부처 장관에 대한 질타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이런 윤 대통령의 인사 조치 언급 이후 최근 탈원전 백지화 정책에 미온적이라고 알려진 산자부 제2 차관을 퇴진시키고 강경성 대통령실 산업정책비서관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윤 대통령의 '인사 조치' 지시는 각 부처 장관들이 이와 같은 '인사 조치'를 스스로 주도적으로 하라는 주문이라고 봐야 한다.
집권 2년차에 들어서 윤 대통령은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만한 성과를 내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실제로 그런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부처를 적극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과감한 인적 쇄신과 국정개혁이 절실한 시점이다. 보신주의와 눈치 보기에 길들여져 있는 직업 공무원에 기대려 하지 말고 임명직 공직자들이 소신과 의지를 갖고 공공기관 정상화에 적극 나서줄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