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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화 ‘애프터 양’이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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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1. 19. 13:52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우선 오프닝 가족 댄싱 장면부터 흥겹다. 그러나 춤 경연이 끝나자마자 가족의 일원인 안드로이드 양이 고장 난다. 이로써 관객은 양을 수리하려고 애쓰는 아버지 제이크와 동행하게 된다. 양은 '중국 문화 테크노 사피엔스'로 제이크 부부가 입양한 딸 미카의 정체성을 위해 사온 로봇이다. 죽은(?) 양의 기억을 쫓아가는 여정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애잔한 서정시와도 같은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아름답다.

그런데 애프터 양은 볼수록 서늘하다. 어떤 장면은 섬뜩하게 다가온다. 사실 이 영화의 기저에 깔린 디아스포라의 정서는 그 아픔이 농축되어 봉인돼 있기에 향기가 날 뿐이다. 말하자면 가공하지 않은 사향 덩어리의 냄새를 맡기 힘든 것처럼, 감히 영화가 품고 있는 상흔을 헤쳐 내어서까지 공감하기엔 너무 버겁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애프터 양은 서정시가 아니라 서사시다. 영화는 타자를 바라보는 편견의 역사에 대한 날 선 비판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애프터 양은 미국 이민사에서 소외된 경계적 존재에 관한 영화다. 경계에 선 이들은 쉽게 희생양으로 선택된다. 그들의 공통점은 타자라는 낙인과 함께 유폐된다는 점이다. 게토에 갇힌 유대인들이 그랬고, 관동대지진 학살 당시 요코하마, 가나가와현의 조선인 거주지가 그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열강이라고 자처했던 나라들은 모두 배제의 정치로써 약자들을 억압했다. 이민의 역사로 시작해서, 민주공화제의 선구자가 된,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1620년, 소수자로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탄 청교도(puritan, 주님의 흠 없는 양들)들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주류사회가 되었고, 이후 그들은 후발 이민그룹들을 배척하고 고립시켜 왔다. 이탈리아계나 아일랜드계가 그 대상이 되었으며, 아시아인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영화 속, 흑백 커플인 제이크 부부를 함께 담은 투 샷은 그들을 각기 다른 '프레임 속의 프레임'에 가둔다. 카메라 앵글은 그들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입양한 딸 미카도 마찬가지다. 중국인 부모에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버림받았더라도, 이제 미카는 백인 아빠 제이크와 흑인 엄마 카이라와 가족이 됐다. 따라서 새롭게 정체성을 만들어 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굳이 유전적 정체성을 찾아준다며 중국 문화를 전수할 목적으로 개발된 안드로이드 로봇 양을 집에 들인다. 영화에서 이들 '다인종 가족'은, 다양한 인종으로 이뤄진 이민 국가지만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 미국에 대한 직유다.

한편, 주인공 제이크는 중국 차(茶)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와 양이 나눈 대화 중에 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이크가 양에게 차에 관한 다큐멘터리 속 대화를 말해주는 장면인데, 찻잎에 관한 묘사가 흥미롭다. 하나의 찻잎에는 비 온 뒤 숲속을 거닐 때, 축축한 공기와 흙 그리고 발에 밟히는 나뭇잎 등 그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내용이다. 어떤 기원을 따지기 전에,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요소가 찻잎에 담긴다는 것이다.

차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혼종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제이크는 찻잎의 '순수성'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그의 상점엔 가루차를 취급하지 않는다. 제이크가 로봇에겐 거부감이 없지만, 복제인간 클론엔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 문화라는 프레임에 가둔, 문화 테크노 사피엔스 양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대하기엔 다양한 경험과 기억을 통해 여러 층위로 주름진 복잡계의 다중체(多衆體)이다.

여기서 제이크라는 캐릭터는 자기중심의 원근법적 사고로 왜곡된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한 환유다. 그들은 여타의 인종들을 함부로 규정하고 배제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규칙을 따르라고 강제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류 사회를 이끌기엔 이미 그 능력을 상실했다. 서두에 소개한 오프닝 댄싱 신이 마냥 귀엽고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파시즘의 기운이 감돌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을 보고 똑같이 따라 하는 댄싱 경연대회가 함의하는 바는, 전형적인 디스토피아적 전체주의 사회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멋진 신세계 세미 버전이다. 특정 권력의 박자에 맞춰, 모두가 싱크를 맞출 것을 요구받는 사회, 그러나 정작 동작이 틀린 것은 제이크다.

애프터 양은 편견으로 가득 찬 미국 주류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더불어, 감독이 유년 시절부터 내면화된 디아스포라의 상처가 오롯이 담겨있는 영화다. 아시아인으로 뭉뚱그려져 범주화되고, 배제의 정치에 노출된 채 성장한 쓰라린 정서가 플롯 저변에 깔려있다. 그럼에도 마지막 신은 관용이라는 보수적 가치로 끝을 맺는다. 영화의 엔딩, 제이크는 홀로 거실에 앉아 있다. 완벽한 데칼코마니 구도로 돼 있는 화면, 정중앙의 백인 남자, 그는 팽팽한 균형을 감내하기엔 너무 무기력하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딸 미카는 그동안 배제돼 온 여타의 이민 사회를 상징한다. 영화는 넌지시 앵글로색슨계 주류 사회에게 여전히 중심이기를 바란다면 차별의 정치를 멈추라고 경고한다. 영화 애프터 양을 마냥 아름답게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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