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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정치인들은 날이면 날마다 당리당략과 사리사욕,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 저급하고 천박한 쌈박질만 하고 있다. 차별화된 철학이나 비전도 없이 위선과 거짓, 오만과 독선, 공허한 호통과 발악, 냉소와 독기만 가득하다. 그들이 벌이는 추태의 현장에 고통받는 국민은 없다. 단테는 '신곡, 지옥' 편에서 국민의 고혈을 짠 부패한 정치인은 뜨거운 기름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빠져나오려고 고개를 내밀면 악마가 쇠갈퀴로 갈기갈기 사지를 찢어버린다. 이 땅의 정치인은 단테의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사회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목격되는 진실성과 진정성의 결여는 당면한 안보나 경제보다 국가 장래를 위해 훨씬 심각한 문제다. 우리 사회에는 내면의 아름다움보다는 겉치레, 실력보다는 간판, 자족하는 삶보다는 남과의 비교를 통한 상대적인 우월감과 행복감의 확인, 고통이 수반되는 명분이나 가치보다는 일시적인 쾌락과 이익의 추구,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가족만 무사하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극단적인 가족이기주의 등이 만연해 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공존과 상생, 연민과 배려, 소통과 협력, 결혼과 출산, 더불어 행복하기 등을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많은 젊은이가 일하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하고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헛된 몽상에 빠져들고 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당하며 실패와 시행착오를 통한 자기 발전과 성장을 독려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정면대결을 두려워하고 결국은 자폐적 공간으로 은둔할 수밖에 없다. 단테는 '지옥' 편 첫머리에서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고 했다. 지옥이란 바로 '희망이 없는 곳'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고대 그리스의 소포클레스는 "인류 대다수를 먹여 살리는 것은 희망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어떤 마음 상태일 때 희망을 품고 꿈과 소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길이 안 보이고 세상이 혼탁할수록 근본으로 돌아가 인간 존재와 삶의 본질을 깊이 음미해 봐야 한다.
테베를 휩쓸고 있는 역병은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자를 처벌해야 사라진다는 신탁에 따라 살인자 수사가 진행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사건의 전모를 짐작하고 오이디푸스가 비밀을 캐지 말고 묻어버리길 바란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생의 비밀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취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오카스테는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는 눈이 있어도 진실을 보지 못한 자기 눈을 그녀의 브로치로 찔러 멀게 하고는 가혹한 운명을 저주하며 방랑의 길을 떠난다. 오이디푸스의 절규는 처절하다. "내게 이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하신 분은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오.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내 눈이 멀쩡하다면 저승에 가서 아버지와 불쌍하신 어머니를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이오. 이런 오욕을 스스로 뒤집어쓰고도 내 어찌 이 백성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겠소?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오, 그건 안 될 말이오. 내 고통을 감당해 줄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 인간 고뇌의 극한을 묘사하며 비극적 아름다움을 완성한 소포클레스의 대표작 '오이디푸스 왕'의 줄거리다.
이 작품은 신의 위력, 신탁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 불완전성이 빚은 비극이다. 뻔한 사실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우리 정치인들은 그에게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바보라고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겠지만, 오이디푸스는 적당한 타협을 거부하고 고난과 파멸 앞에서도 빛나는 정신적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이라는 자긍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 오이디푸스, 그는 파멸했지만 패배하지 않았고, 지도자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영웅이란 초능력을 지닌 슈퍼맨이 아니다. 영웅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지키는 인물이다. 노벨 연구소는 인간 존재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담고 있는 이 비극을 인류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한 적이 있다.
생산성과 효율성이란 기치 아래 속전속결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달성한 우리는 그 과정에서 인간 존재의 문제와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을 등한시했다. 고전 작품은 우리에게 정신과 영혼의 힘을 회복시켜 준다. 책을 통한 자기 성찰은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꿈꾸게 하고 현실 극복의 의지를 길러준다. 좋은 책은 인생 항로 곳곳에 서 있는 우리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삶의 등대다. 책이 주는 감동은 그 무엇보다도 깊고 긴 여운을 남긴다.
/시인·교육평론가
윤일현 시인은…
영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포항제철고 교사를 거쳐 교육평론가로 활동했다. '대구시인협회' 회장을 지냈고, 현재 '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평생 '올바른 학습법'과 '책 읽기를 통한 미래의 길 찾기'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명쾌하면서도 감동적인 글과 강연을 통해 '좋은 부모 되기 운동'을 30년 넘게 계속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시집 '낙동강',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 등, 교육·인문학 저서 '부모의 생각이 바뀌면 자녀의 미래가 달라진다' '밥상과 책상 사이' '그래도 책 속에 길이 있다' 등 총 13권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 콘텐츠' 도서 등에 4차례 선정되었다. '낙동강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