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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주요 사업장 대신 현대차그룹 행사장을 찾았다. 올해 반도체 위기설이 대두되는 것과 관련 별도 메시지는 없었지만, 자동차 관련 행사장을 찾은 것 자체로 미래 먹거리인 전장 사업을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은 취임 2주년인 이날 삼성전자 임직원 대상의 별도 기념 행사와 공식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지난해 취임 1주년 때도 이 회장은 특별한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대신 지난해의 경우 취임 1주년을 일주일여 앞두고 삼성전자 기흥캠퍼스를 방문해 '반도체 초격차' 의지를 강조했었다.
대신 이 회장은 이날 경기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현대차그룹이 주최한 '현대 N x 토요타 가주 레이싱 페스티벌' 행사에 깜짝 등장했다. 삼성물산의 에버랜드 리조트 시설인 레이싱 서킷이기도 한 이곳에서 이 회장은 도요타 아키오 도요타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 등과 회동했다.
이재용 회장은 정의선 회장, 조현범 회장과 함께 현대차 고성능 브랜드인 '현대 N' 유니폼을 입고 아키오 회장을 맞이하고, 오전부터 현대 N×토요타 가주 레이싱 페스티벌 행사장에서 현대 모터스포츠 팀을 격려했다. 대회 시작 전 쇼런(Show Run) 리허설을 지켜보기도 했다.
재계에선 이 자리에서 전장 사업에 관한 협업 논의를 진행했을 것으로 본다. 전장 사업은 이재용 회장이 취임 이전부터 미래 먹거리로 꼽았던 사업 분야다.
특히 이재용 회장은 정의선 회장과 전장 분야에서 의기투합하고 있는 재계 절친이다. 지난 2020년 5월 이재용 회장(당시 부회장)이 삼성SDI 천안공장에 정의선 회장(당시 수석부회장)을 초청한 이후 삼성과 현대차 간 동맹 관계는 더욱 굳건해지고 있다.
두 사람은 전고체 전지 등 전기차 배터리의 현황·전망에 대한 의견을 논의한 뒤 배터리 관련 기술 교류와 선행과제 수행을 진행하며 파트너십을 강화했고 전기차 배터리 공급계약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배터리에서 시작돼 반도체, 디스플레이, 카메라모듈,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등 전방위로 삼성은 현대차그룹와 전장 사업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번 행보로 이 회장이 주력 사업에 대한 재점검 및 조직 분위기 쇄신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고 이건희 선대 회장 4주기, 취임 2주년을 조용히 보냈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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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해석에 힘이 실리는 건 이 회장이 삼성 내부 행사나 가족 모임 대신 모처럼 '외부 행보'에 나섰다는 점 때문이다.
앞서 이 회장은 지난 한주 선친인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 4주기를 맞아 '이건희 소아암·희귀질환 극복사업' 행사(21일), 추모 음악회(24일), 추도식(25일) 등에 연이어 참석했다. 25일에는 추도식 이후 삼성 현직 사장단 50여명과 함께 1시간가량 오찬을 했다.
오는 28일에는 부당합병 및 회계부정 사건 항소심 3차 공판이, 31일에는 삼성전자 3분기 확정 실적 발표를 앞두고 있다. 다음달 1일은 삼성전자 창립 55주년이다. 앞서 삼성전자는 핵심 사업인 반도체 사업의 부진한 성적표를 발표하면서, 반도체 수장인 전영현 부회장이 기술 경쟁력 약화를 반성하며 외부 업황의 문제가 아닌 내부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사과문을 공개했다.
이 회장이 취임 전후 줄곧 강조해온 것은 '기술'이다.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 2주기였던 2022년 10월 25일, 이틀 뒤 예정된 회장 취임에 앞서 사장단 간담회에서 "세상에 없는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며 "미래 기술에 우리의 생존이 달려 있습니다. 최고의 기술은 훌륭한 인재들이 만들어 낸다"고 강조했다. 올해는 첫 공개 일정으로 6세대(6G) 통신기술을 점검하는 등 '기술경영'에 집중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회사 안팎에 보냈다.
지난해에도 이 회장은 취임 1주년을 일주일여 앞두고 삼성 반도체 사업이 태동한 기흥캠퍼스를 방문해 '반도체 초격차'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당시 이 회장은 "과감한 R&D 투자가 없었다면 오늘의 삼성 반도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기술 중시, 선행 투자의 전통을 이어 나가자. 세상에 없는 기술로 미래를 만들자"고 당부했다.
이 회장은 위기 의식과 미래 준비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 2월 설 명절 기간에 말레이시아 사업장을 찾은 이 회장은 "어렵다고 위축되지 말고 담대하게 투자해야 한다"며 "단기 실적에 일희일비하지말자, 과감한 도전으로 변화를 주도하자"고 말했다. 3월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 직원 간담회에서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선행 기술 확보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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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에선 이르면 11월 말 위기 극복을 위한 이 회장의 조직 구상과 사업 전략이 반영된 삼성전자 사장단 및 임원 인사가 일어날 것으로 본다. '뉴삼성'을 위한 인사 폭과 조직 개편 규모가 예년보다 클 수 있다는 예상이다.
지난해에는 삼성전자의 경우 '한종희-경계현' 투톱 체제를 유지하고 사장 승진이 2명에 그치는 소폭 인사로 안정에 무게를 둔 대신 예년보다 일주일가량 앞당겨 인사를 단행했다. 대신 이례적으로 지난 5월 반도체 수장을 경계현 사장에서 전영현 부회장으로 교체했다.
올해 연말 인사에서는 철저한 성과주의 원칙에 따라 실적이 부진한 일부 사장급의 교체가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임원 승진 규모나 전체 임원 숫자도 예년보다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재계 일각에서는 책임 경영을 위한 이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와 그룹 컨트롤타워 부활 필요성 등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 회장은 현재 삼성그룹, SK그룹, 현대자동차그룹, LG그룹 등 4대 그룹 총수 중 유일하게 미등기 임원이다.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의 준법경영을 감시하고 있는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15일 발간한 연간 보고서에서 "경영판단의 선택과 집중을 위한 컨트롤타워의 재건, 조직 내 원활한 소통에 방해가 되는 장막의 제거, 최고경영자의 등기임원 복귀 등 책임경영 실천을 위한 혁신적인 지배구조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