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 시절 당정 권력'서열 2위
한반도 2차 6자회담에도 깊이 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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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중국 동부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시 페이둥(肥東)현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0년부터 1967년까지 중국 테크노크라트(기술 관료)의 산실인 칭화(淸華)대 무선전자학과에 입학, 공부했다. 학업 성적이 상당히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1966년부터 1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 대륙을 강타한 문화대혁명(문혁)의 광풍을 피하지 못했다.
이른바 지청(知靑)이 돼 1967년 상하이(上海)시 전자관3공장 기술원으로 사회에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이후 상하이에 소재한 전자업체들에서 근무하다 1983년부터 상하이 시위원회 상무위원과 부서기를 차례로 역임했다. 이와 관련, 중국 당정은 "문혁 기간 동안 그는 당성(黨性) 원칙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견지했다. 실제 행동으로 (참여를) 거부했다"면서 고인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의 노선을 적극 이행, 상하이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상하이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승승장구하게 됐다.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이끈 이른바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맥)'의 대표 인물로 꼽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장 전 주석 재임 시기인 1994년 권력의 중심인 베이징으로 이동, 당 중앙서기처 서기에 임명될 수 있었다. 또 이듬해에는 부총리로 영전, 국유기업 개혁 작업을 도맡았다.
이 공로로 동년배인 후진타오 전 주석 정권이 출범하자 바로 최고 지도부에 진출할 수 있었다.2003년에는 공식 당정 권력 서열 2위(현재는 3위)인 전인대 상무위원장에 올라 2013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고인은 생전 한반도 문제에도 적지 않게 관여했다. 전인대 상무위원장 시절이던 2003년에는 나름 상당히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북한이 제1차 6자회담 이후 협상 테이블에 복귀하지 않으려 몽니를 부리자 9월 서울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만난 다음 10월에 평양을 찾아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을 설득한 것. 결과적으로 2004년 북한의 제2차 6자회담 참여를 성사시켰다. 묘하게 당시 남북의 지도자들은 모두 그보다 먼저 고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