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남편의 외도와 학대를 겪으며 굴욕적인 삶을 살았고, 늙어서는 외아들조차 방탕아가 되어 떠나버린 채 옛 하인의 집에 여생을 의탁하게 되는 여인의 슬픈 인생사. 남편의 비참한 최후와 몰락하는 가문을 지켜보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어느 귀족 출신 여성의 삶. 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이 그린 '여자의 일생'이란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미자의 노래 '여자의 일생'은 뜻밖에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여자의 일생'은 1968년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주제가였고, 최은희 남궁원이 출연한 이 영화는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을 한국적 감수성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소설 속 여성은 유교문화 시대의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을 떠올린다. 모파상은 자기 고향 노르망디 지방의 유복했던 귀족 가문의 외동딸 잔느의 실제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대중가요평론가 유차영은 이와 관련 "모파상의 소설이 문화예술의 서세동진(西勢東進) 바람을 타고 와서 한국적인 영화와 노래로 부활한 것"이라고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성 우위 가부장 시대 여성들의 삶은 그렇게 힘겨웠다. 귀족 집안일수록, 양반 가문일수록 삼종지도(三從之道)와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윤리 규범을 내세우며 여성들의 희생과 헌신을 제물로 삼았다.
1960년대는 집안과 가족을 위한 여성의 인고(忍苦)가 아직 미덕으로 강제되던 시대였다. 유교적인 이데올로기가 마지막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 하던' 여성의 삶이 실존하던 세월이었다. 그 여성들은 다름 아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기의 어두운 터널을 허덕이면서 지나온 우리네 할머니와 어머니들이었다.
'여자의 일생'이란 노래가 그나마 가슴에 와닿은 세대는 어느덧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60대 이상의 연령층이다. '여자의 일생'은 이들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삶을 조명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이나 행복보다는 가문의 명예나 남편과 자식들의 체면과 성공을 위해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설움을 혼자 삭이며 살아온 여성들의 삶을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진다.
필자 또한 '여자의 일생'을 들을 때마다 할머니가 떠올라 가슴이 저려온다. 청송 심씨 양반가의 규수로 가난한 선비의 후손에게 시집을 와서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오로지 두 남매를 키우며 험한 세파를 애면글면 넘어오신 할머니. 궁핍한 살림에도 집안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맏손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고 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도 딸과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삶에 고난과 아픔이 적잖았다. 그것이 근대화 열풍 속에 허물어져 가는 한국적 여인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오롯이 대변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은 그래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문학평론가 강헌의 비유처럼 배반당할 운명의 순정과 그럼에도 감내해야 하는 희생이 아롱지는 한국판 '여자의 일생'인 것이다.